“적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줘. 미안하다고 한번 말하는 걸로는 부족해. 적어도 세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교도소에 수감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딸 제니는 엄마가 왜 자신을 떠나야 했는지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유가 어쨌건 사과를 받길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제니, 아임 써리. 아임 써리. 아임 써리. 정말로 아임 써리.” 딸의 바람대로 사과하는 엄마를 꼭 껴안으면서도, 제니는 금자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금자가 용서를 구하는 장면만큼이나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딸의 태도에 주목했다는데 이 영화의 섬세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 말하든 두번 말하든 미안하다고 하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겠냐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상처가 해소되는 순간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봤을 당사자에겐 한번은 안되고 세번은 되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최선의 사과는 요구하는 이가 원하며, 납득 가능한 방식의 사과다.
문득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씨네21>이 연속으로 보도하고 있는 홍형숙 감독이 연출한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도용 논란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다. 지난 1240호에 20여년간 해소되지 않은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는 양영희 감독의 글을 게재한 뒤, 영화계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본명선언>에 연출부로 참여했던 서울영상집단 공미연씨가 1998년 당시 양영희 감독의 말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못했다며 서울영상집단의 SNS에 공식적인 사과문을 게재하는 한편, 인터넷상에서는 양영희 감독이 제안한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의 비교상영회를 개최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2월 7일 오후 2시 서울기록원에서 두 영화의 비교상영회가 열리게 되었고, 상영회를 앞둔 2월 둘쨋주엔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가 22년 전 “부정과 타협으로 침묵하고 동조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거듭나기 위해” 글을 쓴다며 <씨네21> 편집부 앞으로 양영희 감독에게 사과문을 보내왔다. 양영희 감독이 기고문을 통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장을 밝히길 요구했던 홍형숙 감독은 여전히 “충분한 협의”가 있었음을 주장하며 무단 도용을 부정하는 한편, 제3자의 입장에서 논란을 지켜보던 이들이 문제 제기자에게 힘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앞다투어 사과하며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왜 많은 경우 수치심은 불특정 다수의 몫이어야 하는가. 업계의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합당한 정서적 지지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이번호 기획기사를 통해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이 일본 방송국 <NHK>와 양영희 감독에게 공동으로 있음이 밝혀지며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도용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단지 자신이 촬영한 9분 40초가량의 영상을 다른 영화에서 삭제했으면 했다는 한 창작자의 문제 제기가 지금의 사태에 이르렀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를 진정성 있는 사과의 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