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후보>는 라미란 ‘원톱’ 영화다. 그가 맡은 3선 국회의원 주상숙은 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인물이다. 전체 분량의 98%에 등장할 만큼 주상숙이 나오지 않는 장면이 없다. 라미란은 “주인공으로서 거리를 두고 서사의 흐름을 지켜보기보다 서사 안에 있었다. 이 장면은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 고민하면서. 그러니까 숲을 본 게 아니라 숲에 들어가 나무를 보면서 연기했다”고 말했다.
-언론배급 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 때 유독 말을 아꼈는데.
=블라인드 시사에 이은 두 번째 관람이었는데 두번 봐서 그런지 약간 혼란스러웠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던 <걸캅스>와 달리 이 영화는 ‘웃겨보자’ 작정하고 뛰어든 작품인데 그날 내 눈높이가 스스로에게 가혹했던 것 같다. 배급 관계자들이 모인 상영관에서 보았는데 반응이 조용해서 ‘멘붕’이 왔다. (웃음)
-<정직한 후보>는 <걸캅스>가 끝난 뒤 고른 작품인데.
=<걸캅스>는 첫 주연작이라 촬영하는 내내 부담감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이런 시도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어 좋았다. 어쨌든 나 같은 사람이 주인공을 하는 사례가 계속 생겨야 한다. 눈 감고, 귀 막고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들면 지르자는 의미로 이번 영화에 출연했다.
-시나리오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하게 된다는 설정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소재가 특별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시나리오가 되게 재미있었다. 연기하는 걸 상상하면서 읽었다. 원작은 남자가 주인공인데 감독님이 영리하게 현지화시켰고, 성별을 바꾸었다.
-주상숙을 어떤 사람으로 보았나.
=영웅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 적당히 타협하고 살다보니 거짓말이 잘못됐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세상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나. 나 하나쯤 괜찮아 하면서 사니까. 하지만 주상숙은 책임감과 도덕성을 갖춰야 하는 국회의원이기에 거짓말이 그에게 큰 타격을 준다. 개인적으로 살다보면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정직해야 하기보다는 현명하게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상숙은 전체 분량의 98%에 등장할 만큼 나오지 않는 신이 없는데.
=여러 인물들이 서사를 분담했던 <걸캅스>와 달리 이 영화는 주상숙 혼자 서사를 끌고 가는 이야기다. 관객에게 사건을 계속 던져주는 역할이라 부담감이 컸다. 촬영 현장에서 기존에 보여준 모습들을 반복하는 건 불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완전히 새로운 재미나 웃음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변신이 필요한 작업이 아니라 내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면모를 끄집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작업이었다.
-상황이 재미있을 뿐이지 인물이 억지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는 아니더라.
=촬영 초반, 감독님에게 주상숙은 진지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이 영화는 코미디지 개그는 아니니까 인물이 애써 웃기려고 하면 이야기에 접근하기 힘들다. 촬영 초반에 벼락을 맞은 다음날 깨어나면 거짓말을 못하게 되는 시퀀스를 찍었는데 감독님은 처음부터 빵빵 터지기를, 나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원했다. 적합한 수위를 찾기 위해 여러 버전을 찍느라 촬영이 오래 걸렸다.
-정치 활동을 할 때는 가발을 쓰고, 집에서는 생머리로 지내는 설정이 재미있다.
=생머리 스타일인 여성 국회의원이 거의 없지 않나. 보통은 짧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한다. 주상숙은 거짓말을 일삼는 국회의원인데 이미지 메이킹을 하기 위해 가발을 씌운 뒤 거짓말을 못하게 됐을 때 가려워서 긁다가 벗어던지는 설정을 넣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없던 설정이었는데 가발 아이디어가 좋았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블랙독>에서 맡은 박성순 선생님 캐릭터는 우리가 익히 알던 라미란의 재미있는 이미지와 거리가 멀어서 인상적이었다.
=촬영 초반 4부작까지 찍어보니 이제껏 해온 작품들과 결이 많이 달랐다. 이야기도, 표현 방식도 달랐다. 코미디가 아닌 장르를 하고 싶은 갈증도 컸고. 박성순은 무표정이 많은 인물인데 감독님이 ‘라미란의 무표정’이 너무 좋다고 하셨다.
-평소 사람들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재미있는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증이 컸나.
=그럼, 항상 그렇다. 운이 좋으면 내 이미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게 현실이다. 비슷한 이미지를 몇년 동안 소진하면 새로운 시도를 더 원하게 된다. 스스로에게도, 관객에게도 지겨워지지 않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