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두개의 사운드트랙이 등장한다. 에이드리언 챈들러와 라 세레니시마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하나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찬트가 다른 하나다. 여인들 각자가 완전히 다른 음을 내어 만들어낸 불협화음은 이내 화음을 이루는 3개의 음으로 수렴되고, 곧이어 리드믹한 가사로 이루어진 몇개의 성부가 넓은 화음을 펼친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강렬하게 기억하리라. 그것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말하는 “살아 있는 음악”이며, 교회의 “죽은 음악”과 구별되고, 먼 밀라노의 극장에 가야만 들을 수 있는 ‘(살아 있는) 타지의 음악’과도 구별된다.
이 살아 있는 음악의 미스터리는 그 가사에 있었고, 음악의 특성이나 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볼 때 굳이 가사의 뜻을 알 필요가 없을수도 있었겠지만, 역시 여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사운드트랙의 가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잠언을 빌려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더욱 작게 보인다”라는 구절이다. 구절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몇개로 분절하여 번역한 것으로 예상된다. 가사에서 등장인물들의 결연한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사실 감독이 빌렸다고 말하는 구절은 정확히 말하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닌 그보다 먼저 출간된 <아침놀>의 잠언이다. <아침놀>의 끝에서 두 번째, 574번에 수록되어 있다. 거의 같은 문장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도 등장하지만 모습이 약간 다르다. “네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시샘에 찬 눈에 너는 더욱더 작게 보이게 된다.” 가사 중 반복되는 부분이 (알려진 대로 ‘Non possum fugere’가 아니라) ‘Non possunt fugere’라면 ‘그들은 날 수 없다’라는 뜻이므로 <아침놀>의 문장이라고 보는 게 맞다. 물론 이 잠언 자체가 출처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누굴 탓하거나 할 일은 아니다.
<아침놀> 내내 니체는 서양의 도덕 체계 전반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신이나 이데아 같은, 삶과는 거리가 먼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거기서 도덕을 끌어내려고 한 서양철학의 역사에 망치를 내리치려는 기세가 매섭다. 그런데 그 기세의 마지막은 예상 밖이다. 574번에 이어지는 마지막 잠언, 575번에서 책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의 모든 위대한 스승과 선구자들은 결국 멈춰 섰다. 나도 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른 새들은 더 멀리 날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마저 서쪽으로 향하면서 인도에 도달하고자 했다고, 그러나 무한에 좌초한 채 난파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고.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운명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완결짓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숭고한 일일지도 모른다. 안될 줄 알면서도 하는 것. 보낼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그렇게 영화는 엘로이즈(아델 에넬)와 마리안느의 사랑을 완성하고, 그 사랑을 불멸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 모든 인용은 <니체 전집> 10권 <아침놀>(박찬국 역, 책세상 펴냄)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