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 서울기록원에서 양영희 감독의 <NHK> TV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과 홍형숙 감독의 장편다큐멘터리 <본명선언>(1998)의 비교상영회가 열렸다. <본명선언>이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지 22년 만에 두 작품이 공식석상에서 나란히 상영된 이례적인 사건이다. 이는 지난 1월 15일 <디어 평양>(2006), <굿바이, 평양>(2011), <가족의 나라>(2013)를 연출한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이 <씨네21> 편집부 앞으로 홍형숙 감독이 <본명선언>에서 자신의 작품 <흔들리는 마음>의 총 9분40초 분량을 무단 도용했다는 메일을 보낸 지 약 3주 만의 일. 홍형숙 감독이 <경계도시2> 제작 당시 스탭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김명화 굿필름 대표(<경계도시2> 제작자)의 제보와 <씨네21>의 연속 보도 이후 양영희 감독의 고발이 이어졌고, 홍형숙 감독은 이를 부인하며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해 논란이 지속 중이다. 이날 상영회는 사전 신청을 통해 100여명의 시민과 기자들이 참석했다. 연단에 선 양영희 감독은 “홍형숙 감독측에 참석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면서,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생리나 소속 집단, 진영 문제와 상관없이 저작권 문제에 상식적으로 접근해주시길 바란다”고 입을 열었다.
기자가 직접 확인한 문제의 9분40초
<흔들리는 마음>은 재일동포인 양영희 감독이 1995년에 일본 아마가사키 고등학교에서 일본어인 통명으로 입학 후 교내 교포회 활동을 통해 한국 본명 선언을 하는 학생들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역시 2년 후 같은 고등학교를 찾아가 재학생들을 만나고, 오사카 내 한인 사회의 활동을 포착했다. 문제의 장면은 약 67분경, ‘1995년 아마가사키 고등학교 3학년 1반 학급 회의’ 챕터에서 <흔들리는 마음> 속 교실 회의 장면이 흑백 처리되어 삽입된 부분이다. 이후에도 본명을 선언하는 재학생 김성미의 발표 장면 등이 원작의 출처 표기나 언급 없이 보여진다. 영화는 이렇게 과거 인물들을 살펴본 뒤 <본명선언> 촬영 중 새롭게 교내에서 한국 이름을 밝힌 재학생 이준치의 스토리와 함께 말미를 맺는다.
“홍형숙 감독을 믿고 참고 자료차 보여준 것뿐”
“그 사람(홍형숙 감독)도 나도 바빴고, 이를 크게 문제 제기하기에는 우리 둘 모두 비교적 무명에 가난했다.”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의 일부를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쟁점은 인용과 도용의 차이다. 상호 합의가 완료되었냐 혹은 소통이 미흡한 채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냐 하는 지점에서 양측의 기억이 엇갈린다. 양 감독은 1995년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홍형숙 감독을 만나 친해지는 과정 중 <흔들리는 마음>의 계획 및 <NHK> 방영 가능성 정도만을 알렸다고 첫 만남을 밝혔다. 이후 연락을 취해온 홍형숙 감독은 재일교포에 대한 관심을 전하며 “<NHK>에 발표도 하기 전에 계속해서 미리 테이프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요지는 “이후에도 약 7개월 분량에 해당하는 촬영 원본 전체를 보여달라는 홍형숙 감독의 끊임없는 요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양 감독은 “재일교포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마웠다. 처음엔 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기에 거절했고, 홍 감독의 뜻을 지지하는 의미로 참고 자료차 테이프를 보냈다”고 정리했다. <본명선언> 초반에 나오는 “양영희 감독이 테이프를 보내왔다”는 내레이션은 마치 자발적으로 사용을 허락한 것처럼 왜곡된 표현이라는 게 양 감독의 주장이다.
한편 지난 2월 4일, 홍형숙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입장문을 통해, 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 촬영분을 사용하겠다는 내용의 구성안이 존재함을 언급했다. 양영희 감독은 “구성안이 몇편이든 의미가 없다. 홍 감독을 믿고 사양 없이 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대신 내 영상을 1초라도 쓴다면 반드시 내게 가편집본을 보여주고 동의를 받으라고 강조했다. 세상 어떤 감독이 자기 영상을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하나?”고 말했다.
저작권 관련 불감증 사라져야
양영희 감독은 1998년 뉴욕 체류 중 <본명선언>의 존재를 알고, 홍형숙 감독과 서울영상집단에 항의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게 분노하는 나 자신이 잘못된 것일까? 한국에서는 원래 이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건가?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화내도 괜찮은 문제지?’라고 물어봤다.” 이어서 “독립다큐멘터리계에서는 원본 소스를 서로 빌려주기도 한다는 관행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집단 논리에 따라 내가 점점 소외되는 상황에 상심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질의응답에서는 홍형숙 감독이 페이스북에 올린, 1998년 9월 21일에 <본명선언>의 최종본과 <흔들리는 마음>의 촬영 원본, 복사본을 국제우편으로 발송했다는 정보(“9월 28일 양 감독으로부터 ‘잘 받았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를 확인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양영희 감독은 “뉴욕에서 자주 이사를 했기에 못 받은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받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법적 조치 및 지난해 미국아카데미협회 다큐멘터리 부문 회원으로 위촉된 홍형숙 감독의 제명 요청 의사에 관해서는 부정했다. 끝으로 이날 자리를 지킨 박찬욱 감독과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코멘트를 남겼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의 60% 이상이 독립영화 감독 및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조합에 가서 상세히 보고하겠다. 긴 시간 절절한 이야기를 잘 들었고, <경계도시2>의 인건비 문제를 포함해 홍형숙 감독의 대응을 기다리겠다.”(박찬욱 감독) “유관 기관의 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최대한 진실 규명에 가까이 가도록 협조하겠다. 지금으로서는 개인이나 영화제 차원의 입장 표명은 할 수 없다.”(전양준 집행위원장)
양영희 감독은 자신이 보다 일찍 이 사안을 공론화했다면 <경계도시2>의 인건비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의식과 연대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통해 저작권에 대한 만연한 불감증이 일깨워지길 촉구했다. 끝으로 <씨네21>은 계속해서 반론과 그 밖의 토론을 위한 지면도 열어두고 있음을 밝힌다. 비교상영회에 참석하지 않은 홍형숙 감독에게는 연락을 취했지만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