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빈폴> 전쟁이 끝난 1945년 소련의 레닌그라드
2020-02-26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전쟁이 끝난 1945년 소련의 레닌그라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키다리’ 이야(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는 어린 소년 파슈카(티모시 그라스코프)와 살고 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파슈카와 함께하는 이야의 일상은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긴다. 뇌진탕 증후군으로 종종 마비 증세를 보이던 이야가 의도치 않게 사고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때 이야의 친구이자 전쟁지원병으로 일하던 마샤(바실리사 페렐리지나)가 이야의 곁으로 돌아온다. 파슈카에 얽힌 비밀은 이야와 마샤를 괴롭게 만든다. 서로를 옭아매던 이야와 마샤의 관계는 니콜라이(안드레이 비코프)와 사샤(이고르 시로코프)와 엮이면서 점차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창작 영감을 받은 영화 <빈폴>은 전쟁을 겪은 여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조명한다. 영화 초반 눈에 띄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도시의 황량함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전쟁으로 인해 치명적인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이야와 마샤 두 사람의 내면세계에 보다 주목하게 된다. 분노와 슬픔, 공허감과 지배욕 등 참혹한 과거와 복잡한 관계에서 비롯된 이야와 마샤의 감정은 그들의 표정과 몸짓, 침묵 등으로 표현되거나 두드러지는 시청각적 장치들로 표현된다. 영화 내내 집요하게 이어지는 붉은색과 초록색의 상징적 대비가 대표적인 예시다. 때때로 영화의 표현이 과도하거나 도식적으로 느껴져 아쉬움을 남기지만, 젊은 감독의 잠재력을 증명할 영화임에는 충분해 보인다. 데뷔작 <가까이>(2017)로 주목받았던 러시아의 91년생 감독 칸 테미르 발라고프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며, 지난해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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