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은 <작은 아씨들>의 온기를 판타지로 만든다. 여성에게 많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 사회에서, 아씨들은 자애로운 부모를 만나 서로를 보듬었다. 그러나 <이장>의 네 자매는 때로 가족 안에서 더한 폭력과 착취를 경험해야 했다. 아들에게 가는 징검다리로써 내가 존재하게 된 건 아닐까 의심하며 살았을 그들은 아버지를 이장하기 위해 모인 하루조차 장남을 데려오기 위해 반나절을 허비한다. “이 모든 게 큰아버지의 고집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체제는 사실 벌 한 마리에 의해 와르르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정승오 감독은 이 쓰라린 가족에 대해 말하며 자주 고개를 숙이고 살며시 웃었다. 자신이 영화 속 남성들 같았던 시간이 계속 떠올랐단다. 가족이 그리워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그가 어쩌면 자매들의 로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장>은 어머니 병문안을 가는 네 자매의 한나절을 그린 전작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의 가족 구성과 전사를 차용하고 있다. 막내이자 장남인 승락(곽민규)이 추가되면서 오남매가 아버지를 이장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공동묘지가 아파트 부지로 결정되면서 무덤을 밀어내야 했던 현장을 본 적 있다. 묻힌 사람들을 끄집어내 집을 지으려 한다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박혀 있었다.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찍고 나서는 이 자매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했다. 강제 이장의 풍경과 남겨진 자식들을 연결하면서 <이장>의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연결의 중요한 고리는 가부장제의 허울을 전면에 드러내는 소재와 화법이다.
=이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던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제사 지낼 때 여자들은 상을 다 차려놓고 남자들이 절하는 동안 병풍처럼 서 있지 않나. 어린 시절 그 모습이 의아해 어른들에게 질문했던 기억이 있다. 제사라는 건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식인데 누구는 절을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다는 게 이상했다. 그런 일상의 차별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그 정체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었다.
-20대 혜연(윤금선아), 윤화(송희준)부터 70대 옥남(강선숙)까지의 인물들이 여성으로서 마주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다. 세대별 여성 캐릭터는 어떻게 구축했나.
=현실에서도 사람마다 가부장제라는 문화에 대응하는 온도차가 있다. 어머니, 이모들, 아내의 가족들 등등 주변 사람들을 모델 삼아 그들의 특징을 포착하려 했다. 그렇게 나온 옥남과 혜연이 양극단에있는 인물이다. 옥남은 관성에 젖어 또 다른 가부장처럼 보이는 여성이고 혜연은 차별을 인지하는 순간 할 말 다 하는, 사실 내 주변에서 보기 힘든 인물이다. 내 바람이 많이 들어간 인물이다. (웃음)
-혜연과 겉모습으로 가장 대비되는 인물은 윤화다. 짧은 머리에 편한 차림을 한 혜연과 달리 윤화는 긴 머리에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또박또박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20대 여성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두 사람을 특별히 대비하려던 건 아닌데 혜연에게는 운동가의 모습을 부여하고 싶었다. 옷차림이 다소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고, 그가 때로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것이 자칫 여성운동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 네딸을 계속 낳은 이 가족 안에서 혜연은 승락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차별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고, 살아남으려 더 애썼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충분히 이런 인물이 나올 수 있다고 봤다. 어찌 보면 이 가족에게 필요한 인물이 아닐까.
-“유학파도 유교파가 되는 게 한국 시부모들”이라는 혜영(장리우)의 대사를 필두로 자매들이 나누는 대화는 기혼 여성들이 공감할 법한 대목이다. 대사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아내의 가족에게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나는 외아들인데, 오남매인 아내의 가족이 만드는 풍경은 언제 봐도 흥미롭다. 그 가족의 일상언어를 많이 가져왔고 중간중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넣어서 포인트를 줬다.
-그에 반해 장남이자 막내인 승락은 영화 중반부에 홀연히 나타나 침묵으로 일관한다. 영화가 그에 대해 말을 아낀 이유는 무엇인가.
=부끄럽지만 승락은 예전의 내 모습이 반영된 인물이다. (웃음) 남성이기에 감정을 숨겨야 했던 집안 분위기와 군대문화 속에서 승락에게도 관성이 생겼을 테다. 불합리함을 직감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거다.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가부장제와의 이별을 외치며 살아오지만 남성들은 그러지 못한다. 누나들이 유리창을 깨고 승락을 지하에서 꺼내오지 않나. 숨어만 있지 말고 마땅히 해야 할 사과를 하라는 의미였다.
-<이장>을 찍으며 가부장제에 대해 고민한 만큼 감독 본인의 일상도 변화를 겪었을 것 같다.
=가사 분담을 한다고 해도 아내에 비해 내 시야가 좁다고 느낄 때가 많아졌다. 아내는 늘 그래야 하는 사람처럼 집안 곳곳을 살핀다. 비누가 떨어지면 먼저 사온다든지 말이다. 나도 애쓰고 있으나 아내에 비하면 부족하다. 또 다른 변화는 아버지에게 왔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엄청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가 전주에서 영화를 보신 후 달라지셨다. 위험한 발언을 자주 하시는 큰아버지에게 동조하시던 분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라고 일갈하시더라. 신기할 정도로 큰 변화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용인대 영화영상학과에 입학해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영화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했고 제대 후엔 작은 회사에 다녔다. 그때 친하게 지낸 동네 형이 있는데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 후 1년간 칩거했다. 먹고 자는 생활을 반복하다 우연히 영화 한편을 봤다. <패치 아담스>였는데, 참 희한한 기분이 들더라. 칩거 생활을 청산하게 만든 영화다. 그 힘에 매료되어 영화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늦게나마 다시 수능을 보고 영화과에 들어갔다.
-<패치 아담스>가 영화를 시작하게 했다면 어떤 작품 혹은 감독이 영화를 지속하게 했나.
=요즘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마렌 아데다. 얼마 전 <씨네21>에 <토니 에드만>으로 ‘내 인생의 영화’ 칼럼도 썼다. 인간관계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문제까지 잘 포착해내는 감독이다. 유머도 좋고.
-단편부터 첫 장편까지 가족 이야기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토니 에드만> 같은 가족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서 얼마 전에야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릴 때 금방 해체된 가족에 대한 결핍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가족에 대한 반추가 타인의 가족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늘 쓰고 나서야 가족 이야기가 됐다는 걸 알아차린다. (웃음)
-앞으로 더 탐구하고 싶은 주제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헐뜯고 싸우다가도 연대하게 되는 희한한 순간들이 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게 되는 그 힘에 관심이 많다. 그런 힘을 도모해내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