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 살아남은 이의 기억을 통해 역사가 기술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2020-03-31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 거트만(크리스토퍼 플러머)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고 있다. 거처하는 실버타운에는 거트만을 돌봐주는 간호사와 다정한 친구들이 있지만 치매를 앓고 있는 그에게 현재의 기억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노쇠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그의 기억력은 종종 아내의 죽음조차 잊을 정도로 쇠퇴한 상태다. 살아온 세월이 오롯이 육체에 새겨지는 동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어딘가로 깊숙이 숨어버린 듯, 그는 계속 망각 속으로 침잠해간다. 그런 거트만을 옆에서 지켜보아온 친구 로젠바움(마틴 랜도)은 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로 결심하고 긴 편지와 함께 거트만을 여행길로 안내한다.

소멸해가는 육체의 마지막 힘을 다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거트만은 조금씩 더 힘겨운 시간 속으로 향한다. 한발 한발 내디뎌 그는 결국 그의 기억이 얼어붙어버린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곳은 아우슈비츠다. 그가 죽을힘을 다해 탈출한 곳, 그러나 결코 잊힐 수도 잊어서도 안되는 곳. 복수를 위해 아우슈비츠 구역장이었던 이를 찾아가는 거트만의 여정 속에서 참혹한 시간이 되살아나고, 우리는 살아남은 이의 기억을 통해 역사가 기술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가족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세계를 바라보곤 하는 아톰 에고이얀의 작품답게, 거트만이 여정 중 만나는 인물들은 이 세상 하나하나의 상이 되어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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