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나는 날마다 지구를 떠난다,
2002-05-08

‘고양이 빌딩’으로 유명한, 왕성한 독서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이란 책을 요즘 열심히 읽고 있다. 이 책은 우주 왕복선을 타고 달착륙 계획에 참여했던 나사의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여행을 체험한 뒤 변화된 삶을 취재하고 쓴 글이다. 어떤 사람은 우주에서 신을 만났다며 전도사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우주비행 때 지구환경이 크게 오염된 것을 보고 환경운동가가 되었다고 한다. 국민적 영웅이 된 뒤 정계로 진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환 뒤 정신이상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다. 우주비행사였던 슈와이카트의 말처럼, 우주를 체험한 뒤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지금 사람의 뇌를 모델링하겠다는 허황된 몽상을 꿈꾸는 신경물리학자가 됐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꿈은 천체 물리학자였다.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선 산책길을 걸으며 우주탄생의 기원을 생각하고, 동료들과 자전거 여행을 하며 ‘웜홀을 통한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토론하며 살고 싶었다.

내가 10년 가까이 천체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던 데에는 영화의 ‘탓’도 컸다. 1982년, 전세계적으로 영화 <ET>가 세상을 뒤집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어린이들 손엔 양배추 인형 아니면 ET 인형이 하나씩은 쥐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유행에 휩쓸리긴 싫었던 모양인지 일부러 영화를 보지 않고 있다가, 2년 뒤쯤 변두리 극장에서 재개봉했을 때 극장을 찾았다.

나는 그날 스크린에서 제임스 어윈이나 에드거 미첼이 우주왕복선에서 본 아름다운 달을 ‘체험’했다. 창백하고 거대한 달을 뒤로 하고 엘리엇이 ET를 태우고 자전거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장면은 초등학교 6학년생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을 만큼 경이로웠다.

영화가 끝나고 135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창 밖에선 ‘오늘 따라 유난히 큰’ 달이 우리 버스를 계속 쫓아왔고, ET와 엘리엇의 자전거가 뒤를 따랐다. 나는 그날 밤 천체 물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외계인을 만나는 최초의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뒤로 나는 종종 극장에서 우주체험을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밤은 1996년 9월21일. 날짜도 기억한다. 국제영화제가 열린다고 해서 수업도 빼먹고 찾아간 부산. 수영만 야외상영관에서 본 오토모 가쓰히로의 <메모리스> 첫 에피소드 ‘그녀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 스크린이 놓여 있고, 그 속에서 우주공간을 떠도는 우주선 너머로 로렐라이의 노래가 들려온다. 바다와 하늘과 영화와 그 속의 우주공간이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나는 비록 (혹은 다행히^^;) 천체 물리학자가 되진 않았지만, 지금도 스크린을 통해 우주를 체험한다. <콘택트>에서 혹은 에서, 암흑의 우주를 부유하기도 하고 아득히 멀리서 찬란한 빛을 발산하는 별들의 무거운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지구를 떠나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고 우주비행사 제임스 라벨은 말했던가. 나는 날마다 지구를 떠난다.

글: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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