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를 기억하다
2020-04-22
글 : 송경원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왜, 무엇을 위해, 무슨 자격으로 영화를 감히, 비평하는 것일까. 이 잉여롭고 비생산적인 작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째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 때론 몸살에 걸린 듯 온몸이 아팠고 그 진통을 믿으며 글을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한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참을 수 없기에, 쓴다. 감히 영화비평의 최전선에서 뒹굴어보겠다는 무모한 심정으로 김소희·김병규·안시환 평론가와 함께 프런트 라인에 섰다. 재난(disaster)은 그리스어로 ‘별’(aster)이 ‘사라진’(dis) 상태를 뜻한다. 여전히 헤매고, 숱하게 구르고, 끊임없이 실패하겠지만 별을 향한 우리의 방황을 지켜봐주길 바란다.

<컨테이젼>

재난에 얽힌 세 가지 풍경

마음을 다지고 최전선에 섰더니, 영화가 사라졌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외출을 삼가고 있는 요즘 기묘한 사진 몇장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비어버린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광장, 사람이 사라져 물이 맑아졌다는 베네치아의 수로, 인적이 끊긴 로마 거리를 수행원 몇명과 함께 거니는 교황의 모습까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보도된다. 그런데 이 있을 수 없는 사진들을 보고도 신기하다거나 섬뜩하기보다는 익숙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전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이미지들이 낯설지 않다. 언젠가,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 일들이 스크린 너머 일상에서 재현되고 있다.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영화를 따라잡고 있는 기묘한 사태 앞에서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경험한다. 지금부터 전할 세 가지 풍경은 코로나19라는 사태와 얽힌 각기 다른 진술들이다.

재난과 재난영화 사이의 간격

첫 번째 풍경은 재난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다. “왜 지금 같은 시국에 영화에서까지 재난 상황을 마주하고 싶어 할까요?” 얼마 전 지인의 경험담이다. 영화계 종사자인 그는 주변에서 요즘 볼 만한 영화가 없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몇편을 추천해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대체로 지금과 같은 시국을 다룬 재난영화들에 꽂혀 있는 걸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2011)이나 김성수 감독의 <감기>(2013)가 요즘 부쩍 검색어에 오르내리며 재소환되고 있다. 평소라면 감염병 상황을 다룬 재난영화를 소비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스크린 바깥에서 영화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지금, 왜 굳이 스크린에서까지 재난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걸까. 지인의 의문은 명료했다. 사람들은 왜 재난 시국에 재난을 소비하고 싶어 하는가.

단순하게는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은 평등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정확히 사건은 파편적이되 사태는 안개처럼 전면에 퍼져나간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식에 불안과 공포가 곰팡이처럼 피어나지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난의 당사자라기보다는 번호표를 뽑아든 예비자다. 우리는 재난의 전조와 변화된 일상까지 뭉뚱그려 ‘재난’이라 명명하지만 대부분은 재난의 불똥으로부터 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알고 싶다. 전염병이 어떤 과정으로 퍼지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어떻게 종식될 것인지가 궁금하다.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안전장치를 치고 이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서다.

<컨테이젼>이 여느 전염병 소재의 영화와 다른 점은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대개 재난영화에서 재난은 극복해야 할 상황으로 제시될 따름이다. 정작 영화가 뼈대로 삼는 건 재난이 아니라 이를 돌파하는 인물들의 관계다. 어떤 경우 이는 주인공의 영웅담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인물의 성장을 따라가기도 하며 간간이 로맨스가 양념처럼 버무려지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위기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연대에 초점이 맞춰지며 재난이라는 압력이 더해질수록 관계는 단단해진다.

반면 <컨테이젼>의 서사는 파편적이다. 감염자 가족, 역학조사관, 질병관리본부, 사이비 기자 등 각각의 자리에 흩어진 사람들의 상황들이 교차된다. 교차되는 정보, 라는 톤을 유지하기 위해 영화는 한자리에서 회의하는 상황을 찍을 때조차 수시로 장면을 쪼개고 나눈 뒤 붙인다. 이것은 단절되어 있다는 간격의 확산이다. <컨테이젼>이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보를 재현하는 방식이 얼핏 건조하고 객관적인, 그러니까 뉴스나 다큐멘터리의 톤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착각이다.

<컨테이젼>의 시작과 끝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위치를 지정한다. 홍콩 출장을 다녀온 베스 엠호프(기네스 팰트로)가 기침을 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날짜는 2일째. 이후 영화는 백신이 개발되어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한 135일째에 도착할 때까지 혼란과 공포가 퍼져나가는 일련의 상황을 따라간다. 베스의 가족은 엄마와 아내를 잃었지만 남겨진 딸과 아빠는 일상을 살아간다. 드라마는 거기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영화는 에필로그처럼 가장 마지막 순간에 구태여 1일째를 보여준다. 1일째에는 전염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이 식당에서 밥을 먹은 베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즉 이 순간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명확해진다. 이것은 전염병을 보고자 하는 영화다. 그리고 신의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이는 오직 관객이다. 관객만이 이 모든 정보의 최종 소비자다.

<컨테이젼>을 왜 다시 보고 싶어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영화는 모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재난이란 통제 불가능한 상황, 전염병이라는 공포조차 정리정돈하여 깔끔하게 전달한다. 여기서 두렵고 혼란스러운 건 정보가 차단되고 소통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뿐이다.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불안하지 않다. 아니 그들의 불안을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안전해진다. 관음증의 자리. 가장 안전한 곳에서 명확한 메커니즘을 확인하는 행위. 즉 우리의 관람은 오히려 불안한 현실에서 잠시 탈출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된다. 저런 방식으로 전염병이 퍼지는구나 하는 확인. 결국 이 기나긴 재난의 터널도 언젠가는 저렇게 끝이 나겠구나 하는 안심. 우리는 재난 상황에서 답을 목격하기 위해 재난영화를 본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당연한 말인데, 관객은 종종 이 당연한 간격을 잊어버린다. <컨테이젼> 같은 영화가 다소나마 착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영화는 얼핏 투명하게 세상을 재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을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을 이야기로 정리하는 순간 발생하는 필연적인 간격이다.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인과관계의 연쇄다. 사건을 고르고 순서를 정하고 배열하는 행위.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 삭제되는 순간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투명한 창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령 <컨테이젼>이 제시하는 전염병의 전파 경로가 진실인가. 첫 번째 전파자인 베스 이외 전파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현실은 그걸 몰라서 불안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없다고 결정해준다. 하지만 정보가 투명해질수록, 그러니까 인물들 사이에서 정보를 가로막는 물리적인 장벽(예를 들면 편집을 통해 연결시키는 공간과 시간)이 얇아질수록 실제 상황과는 멀어진다. 스크린이란 막을 사이에 두고 간격이 벌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간격을 지우고자 애쓴다. <컨테이젼>의 경우 다큐멘터리와 뉴스 화면에서 봤던 정보전달 방식을 흉내내며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감기>처럼 극 중 인물에게 감정적인 몰입을 유도하여 밀착시키는 경우도 있다. 쓰나미 상황을 다룬 <더 임파서블>(2012)에서는 1인칭의 시점을 통해 현실 속 체험을 모방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재난영화를 다시 보며 새삼 이 간격들을 실감했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바깥의 풍경이 바뀌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스크린 안쪽에서 상상하고 재현했던 것들이 스크린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지금, 스크린 안쪽이 그렇게 안락해 보일 수가 없다.

내게 있어 재난영화들은 스토리가 아닌 정황으로 기억된다. 위기 탈출의 지난한 과정이나 결과, 공포의 윤곽이 보다 인상 깊은 건 언제나 단 한장의 이미지였다. <컨테이젼>에서 방호복을 입고 개나리가 효과가 있다는 전단지를 배포하는 사이비 기자의 위험천만한 행동보다 강렬한 건 그가 거니는 도시의 풍경, 도시 기능이 마비돼 쓰레기 천지가 된 거리의 모습이다. 불안을 유통시켜 거리를 페허로 만든 사람이 홀로 폐허 속을 걷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때 그 거리의 모습이 지금 지구촌 어딘가에서 재현되는 것을 뉴스로 접하며 오싹함을 느낀다. 반대로 현실에서 멀어짐으로써 현실을 압도하는 이미지도 있다. <감기>는 대체로 전형적인 드라마와 다소 과장된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단 한장의 이미지가 논리를 후벼파고 들어와 자리한다. 돼지를 살처분하듯 운동장에서 사람들의 시체를 대량으로 처리하고 있는 장면은 실로 충격적이다. 그 순간 영화는 현실을 압도함과 동시에 선언한다. 영화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간격을 발생시키고 있지만, 그 한장의 이미지만큼은 때때로 불쑥 간격을 좁히고 들어와 현실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현실보다 현실 같은 영화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

두 번째 풍경은 빈 극장들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 질문에는 꽤 긴 행간이 생략되어 있다. 정확히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내러티브 상업영화를 제외하고, 영화란 무엇인가. 좀더 덧붙이자면, 같은 이야기를 보고 나와도 모두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뚜렷한 메시지나 언어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음을 감각할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가. 우리가 간격만큼이나 쉽게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관계와 시간이다. 텍스트와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 대상, 즉 관객 말이다. 영화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스크린 안쪽에 새겨진 텍스트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시간을 포함한, 관계의 과정이야말로 '영화'다. 영화의 개념을 ‘영화보기’라는 행위로 확장했을 때 비로소 인지되는 몇 가지 물리적인 조건이 있다. 그중 첫 번째가 바로 극장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가 사라졌다’는 건 그런 의미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OTT를 비롯한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영상물을 감상하지만 거기에 (적어도 내가 사랑했던 고전적인 개념에서의) 영화의 자리는 없다.

얼마 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과 <1917>(2019)을 연달아 극장에서 보며 문득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이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극장이란 공간을 필요로 하고 스크린이란 조건을 최적으로 활용하는 결과물이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는데 한편은 모든 에너지와 구성요소가 스크린 안쪽을 향하는 반면 다른 한편은 스크린 바깥으로 종종 그림자를 뻗어나간다는 점이다. 강조하건대, 이건 개인적인 체험의 영역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행위는 이 체험의 연장선에서 성립한다고 믿는다. <1917>은 구심력의 영화다. 모든 재현은 카메라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관객은 오직 카메라라는 이름의 창을 통해서만 그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 이것은 제한된 시야로 주변을 훑어 시뮬레이션하는 행위다. 결국엔 관객의 뇌리에 1차 세계대전 전장의 모습이 그려지긴 하지만 그것은 스크린 안쪽에 구축된 가상의 공간임을 깨닫는다.

반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원심력의 영화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된 것마냥 매 화면 한폭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좀처럼 프레임을 흔들거나 화면을 바깥으로 열지 않는다. 엄격하고 정확한 프레임으로 수십장의 화폭을 만들어낼 따름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프레임이 견고해질수록 스크린 안쪽의 어둠은 바깥으로 동화되어 어느새 극장의 공기를 잠식한다. 마리안느가 어둠 속에 잠긴 엘로이즈(아델 에넬)를 응시할 때, 엘로이즈의 치마가 선연하게 불타오를 때 사각의 프레임이 무력화되고 극장에는 오직 엘로이즈와 내(관객)가 마주보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순간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화면이 아니라 대화나 이야기 바깥의 침묵이다.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침묵이 깃든 정적의 시간을 관람하는 행위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떠오른 이유는 이 두 영화의 차이 때문이었다. <1917>은 마치 투명하게 다 보여주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다. 반대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어둠 속, 혹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상태에 잠김으로써 영화관 내부에 관객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영화다. <1917>은 환상을 통해 간격을 지우려 하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반대로 침묵과 어둠을 통해 간격을 확보한다. 관객은 떨어진 자리에서 인물과 카메라의 관계, 카메라와 이야기의 마찰을 끊임없이 목격한다. 영화의 형식들은 당대의 편견, 고정관념, 내러티브로 대표되는 모든 딱딱한 것들과 수시로 충돌하며 불꽃을 일으킨다. 우리가 극장에서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 불꽃이다. 때문에 이런 종류의 영화는 극장이, 자유를 속박하는 극장의 어둠이, 그 침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역시 극장을 필요로 한다. 어둠을 필요로 한다. ‘알 수 없음’을 필요로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손전등 하나 분량의 영화다. 나는 이 영화만큼 어둠을 아름답게 사용한 장면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 에드워드 양은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고, 모든 사건을 논리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저 매 순간의 상태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갈 따름이다. 영화는 보여주는 부분보다 포착하지 못하는 분량이 훨씬 많고, 그 상태를 전등 불빛으로 그려낸다. 조그만 전등 불빛에 의지해 겨우 눈에 보이는 사소한 분량. 그 주변에는 감히 알 수 없는 압도적인 어둠들이 있다. 스크린 테두리의 어둠이 스크린 바깥으로 이어질 때, 종종 테두리는 사라지고 나는 영화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내던져진다. 감각의 교란 대신 관객의 치열한 사고와 감흥을 통해 구축되는 리얼리티. 그것은 극장이라는 제한된 상황, 약속된 장소에서만 허락되는 기적 같은 만남이다.

공간에서 장소로, 당신의 풍경은

물론 굳이 극장이 아니라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극장’은 물리적인 의미의 공간(space)이 아니다. 차라리 축적되는 시간과 체험에 가깝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극장이 있다. 각자 영화와 만나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때로 어떤 영화들은 그 시간 안에서만 유의미하다. 각자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스크린 속 텍스트와 함께 (사진처럼) 기억될 때 그곳은 나의 ‘장소’(place)가 되는 것이다. 영화란 관람행위를 포함한 장소이며, 장소는 공간과 시간의 통일태다. 극장이라는 빈 공간은 영화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사태들로 채워진 뒤에야 비로소 나의 장소가 된다. 그리하여 (관계와 행위로서의) 영화가 탄생한다.

물론 영화에 대한 고전적이고 편협한 형태의 정의라고 비판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모하면 개념도 함께 변화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아니 그러므로 나는 나의 경험을 근거로 최선을 다해 저항하고자 한다. 최근 텅 빈 극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아 올랐다. 영화는 투명해질 수 없다. 영화가 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스스로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고, 한계를 인지하고, 재현의 마찰들을 응시하는 일이다. 이야기나 메시지가 아닌 언어로 치환 불가능한 구체적인 사태들. 그것은 때론 장면이 될 수도 있고, 인물과 카메라의 관계가 될 수도 있으며, 침묵의 순간을 선사하기도 한다. 결국 뇌리에 남는 건 오직 정황이다.

이제 마지막 풍경을 말할 차례다. 나의 첫 영화, 그러니까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였다. 중학생 시절 단체관람으로 끌려가서 본 영화인데 지금 생각해도 중학생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그 영화를 보러 간 선생님의 선택이 우습고, 감사하다. 중년 남녀의 사랑이 제대로 전달될 턱이 없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한 장면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비 오는 거리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소는 아직도 사진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 시절에도 이해는 안됐지만 울컥하는 무언가가 느껴졌고, 다른 이에게 그 감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끝내 찾지 못했다. 아마도 영화란 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영화 글쓰기는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짝사랑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내게 있어 이 장면은 텅 빈 관객석을 포함한 한 프레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함께 보러 갔던 친구들은 모두 포기하고 극장을 떠났지만 끝까지 남아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이스트우드의 얼굴. 어쩌면 나의 영화글 쓰기는 그 순간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때 극장의 풍경, 냄새, 분위기, 정황들을 빼놓고 이 영화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로마>를, <아이리시맨>을 (운 좋은 몇몇을 제외하곤)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제 곧 <사냥의 시간>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이 영화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 당신은 이 영화를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조우할 것인가. 재난을 맞이한 오늘의 영화 앞에서 당신의 눈에 각인될 한장의 이미지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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