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영화들과 그 연장에서 살펴본 공포영화 '온다'
2020-04-22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더 어두워져도 좋을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영화를 만든다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22회 공포소설대상을 받은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가 원작이다. <보기왕이 온다>를 먼저 읽었다. 사와무라 이치는 호러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였고, 데뷔작인 <보기왕이 온다>에 자신이 좋아하며 무섭다고 생각하는 호러의 요소들을 모두 산뜻하게 담았다. <불량공주 모모코>(2004),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고백>(2010), <갈증>(2014)은 모두 원작이 있었다. 원작의 매력을 살리면서, CF 감독으로 유명한 이력답게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라는 장르에서 어떤 이미지 그리고 장면을 만들어낼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호러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다. 유명한 호러영화의 오싹한 장면만 적당히 따서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과한 착각이다. 여행길에 살인마를 만나는 지극히 식상한 이야기라도 리드미컬하게 긴장감을 끌어내고 고어나 섬뜩한 장면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멋진 호러영화가 된다. 반면 독창적이며 감각적인 소재라 해도 전혀 무섭거나 긴장감 없이 지루한 호러영화는 허다하다. 공포영화 마니아들이 마구잡이로 모든 호러영화를 보는 이유는 소재나 줄거리만으로 완성도를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링>과 <주온>에서 신인인 나카타 히데오와 시미즈 다카시 감독을 발탁했던 이치세 다카시게 프로듀서는 공포영화로 인정받은 감독들은 모두 테크닉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장르를 만들어도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이블 데드>의 샘 레이미와 <데드 얼라이브>의 피터 잭슨과 <크로노스>의 기예르모 델 토로가 그렇듯이. 나카시마 데쓰야의 공포영화 <온다>를 각별히 기대한 이유도 현란한 테크닉 때문이었다.

<온다>는 ‘보기왕’이라는 괴물이 행복한 가정을 파괴하는 이야기다. 좋은 남자이며, 우수 사원이고, 모범 남편인 히데키(쓰마부키 사토시)와 결혼한 카나(구로키 하루). 딸 치사가 태어나고 행복한 날을 보내던 그들에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누군가 히데키를 찾아왔다며 말을 전하던 회사 후배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 무엇인가에 심하게 물린 상처 때문이다. 기이한 사건들이 이어지자 히데키는 민속학자인 친구 츠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잡다한 글을 쓰는 삼류 저널리스트 노자키, 그의 애인이며 클럽에서 일하는 퇴마사 마코토가 히데키의 집을 찾아온다. 전형적인 스토리다. 어릴 때 보았던 시골의 요괴가 어른이 되어서도 찾아왔다. 스티븐 킹의 전매특허인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공포를 불러오는 이야기. 하지만 사와무라 이치는 호러물 마니아다. 공포물의 컨벤션을 잘 알고 좋아하기 때문에, 익숙한 호러물의 스토리에 흥미로운 요소를 가득 담아낸다.

그러나 나카시마 데쓰야가 소설 <보기왕이 온다>에 끌렸다면 아마도 호러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요소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행복한 가정. 히데키는 잘생겼고, 다정하고, 육아에도 열심이다. 히데키가 작성하는 육아 블로그를 본다면, 그는 완벽한 남편이다. 그러나 정말일까? 병원에 찾아간 히데키에게 후배는 말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블로그의 세계는 만들어진 가짜 행복으로 가득하다. 초반에는 몇몇 장면들이 스치듯 묘사된다. 집들이 때 힘들다고 호소하는 카나에게 히데키는 웃으며 슬쩍 넘어가버린다. 출산 직후 싫다는 카나와 함께 굳이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린다.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지만 그 찰나가 바로 히데키라는 인간의 본모습이다. 타인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는 히데키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왕이다.

나카시마 데쓰야의 전작인 <갈증>과 <고백>은 섬뜩했다. 중학생인 A와 B는 선생의 아이를 죽인다.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열등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딸의 행방을 찾아 헤매는 전직 형사는 도대체 그녀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다. 나 자신도 모르겠다. 알면 알수록 미궁에 빠진다. 이 세계도 모르겠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히데키는 좋은 남자가 아니라 좋은 면만 세상에 보이고 싶어했던 남자다. 아이가 탁자에 부딪쳐 이마를 다쳤을 때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아이가 응급실에 들어가자 블로그에는 다른 말을 쓴다. 아이가 다쳤을 때 부모는 침착하고 냉정해야 한다고. 그것을 본 카나가 힐난하자 히데키는 오히려 비아냥거린다. 카나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히데키가 죽은 후 카나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과거를 보면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카나는 말한다. 죽어줘서 기뻤다고.

나카시마 데쓰야는 히데키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를 악마로 그리지는 않는다. 히데키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타인을 무시하고 이용하는 인간이지만 가족을 지키는 것에는 진심이었다. <갈증>에서, 남편이 무자비한 킬러라는 것을 알게 된 아내에게 자신을 용서할 수 없냐고 물었던 아이카와보다는 낫다. 침을 뱉으며 노려보는 아내를 아이카와는 냉정하게 죽여버린다.

아니다. 어쩌면 모두 비슷할지도 모른다. 나카시마 데쓰야가 <고백>부터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모두가 아수라장이다. 히데키가 죽은 후, 이전 직장으로 돌아간 카나는 일과 육아로 고단한 생활을 하게 된다. 혼자 힘으로는 둘 다 제대로 하기는 너무 힘들다. 몰리고 몰리다가 카나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엄청난 악몽을 꾸고 깨어났을 때, 나는 완전 다른 생물로 변해 있었다.’ 요괴는 인간의 틈을 파고든다. 거짓말하는 사람들, 일상과 욕망이 따로 노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허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온다>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평범한 이들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 츠다는 잘난 척하는 히데키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하고, 빼앗은 후에도 산산이 부숴버리려고 한다. 츠다는 말했다. 시골에서 아이를 잡아간다는 요괴의 전설은 대부분 가난이나 다른 이유로 아이를 죽인 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고. 인간은 모두 잔인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츠다 역시 보기왕의 제물이 된다.

퇴마사인 마코토와 언니인 코토코. 그들은 ‘오염된 것을 씻어내고 원래대로 되돌리는 일’을 한다. 처음부터 인간이 더러웠던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타인을 속이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다른 존재가 된다. 일본의 ‘오니’(鬼)는 원래부터 요괴인 것도 있고, 물건이나 동물이 변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인간이 변해버린 존재다. 미움이나 원한 혹은 슬픔이 너무 강하면 요괴가 된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어느 순간 다른 존재가 된다. 거울 속의 나 같은 것. 히데키도, 카나도 이미 요괴가 되어버렸기에 보기왕에게 쫓긴 것이다.

긴장감이 넘치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중반까지 <온다>는 매력적이다. 아니, <온다>의 장점은 분명하게 있다. 인간의 이중성, 다면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보다보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들이 보통의 우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복과 이면에 숨겨진 비극을 한순간에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비상하게 날카롭다. 갑자기 들리는 히데키의 비열한 말이나 츠다의 추잡한 행동들. 초반의 무서운 장면들도 좋았다. 피 묻은 손이 유리문을 치고, 퇴마사 노인의 팔이 뜯기며 피가 튀는 광경은 섬뜩하다. 나카시마 데쓰야의 테크닉은 <온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호러영화 애호가 입장에서 본다면 미진했다. 마코토가 보기왕과 대결하는 장면은 긴장감이 넘치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존재감으로 모든 것을 끌어가는 느린 템포도 아니다. 영화 초반에도 보여줘야 할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이맥스. 소설을 읽으면서 부디 영화로 나오기를 기대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퇴마사 코토코와 보기왕의 처절한 대결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글로 읽는 것도 재미는 있었지만, 읽는 내내‘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나서도, 이 장면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나카시마 데쓰야의 <온다>는 가장 중요한 장면을 어슬렁 넘어가버린다. 거대한 제의, 어둠의 축제로서 퇴마의 결투를 그려낸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제의를 준비하는 과정은 보기에 매우 좋았으나 본편이라고 할 코토코와 보기왕의 대결은 참으로 초라하고 미약했다. 일본의 격투기대회는 선수의 등장과 소개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정작 경기는 보잘것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느낌이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리메이크한 <서스페리아>를 볼 때의 심정과 도 비슷했다. 중반까지 멋진 장면들을 보며 약간의 의구심이 있어도 클라이맥스를 기대했지만 대실망이었다. <서스페리아>도, <온다>도 클라이맥스는, 호러에 관심 없는 감독의 다소 공허한 스펙터클이었다.

<온다>를 보고 나서 확실한 심증이 생겼다.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은 호러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 소설에서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는 보기왕의 이력이다. 해리 포터의 숙적 볼드모트처럼, 사람들이 부르는 것 자체를 꺼려했기에 이름이 없었던 요괴는 어떻게 보기왕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소설에서는 보기왕의 이력을 추적하는 과정은 단지 흥미 요소나 TMI(굳이 필요가 없거나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아니라 요괴가 어떻게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진화해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온다>에서는 보기왕의 이력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온다>를 보고 난 후에도, 보기왕은 어떤 요괴인지 알 수가 없다. 나카시마 데쓰야의 관심은 요괴가 아니라 인간이다. 요괴가 되어버리는 인간에게는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초자연적인 존재에는 별 흥미가 없다.

그럼에도 <온다>는 흥미로운 영화였다. 클라이맥스만 빼면 재미도 있었다.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요괴는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홀린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인간들의 내면은 무엇 때문에 텅 비어버린 것일까. 히데키도, 카나도, 츠다도 왜 틈이 생겨버린 것일까. 인간의 어둠을 찾아가는 나카시마 데쓰야의 시선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나카시마 데쓰야는 “내가 영화에서 주로 보여주는 인물은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량공주 모모코>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코멘트였다. 모모코는 로코코 시대의 복장에 열광하는 오타쿠이고, 이치코는 욕과 폭력이 일상인 동네 폭주족이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모모코와 이치코는 친구가 된다. 너무나도 다르지만,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카시마 데쓰야의 말을 빌리면 ‘모모코의 독기와 이치코의 근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평범함이나 상식에서 아주 멀리 있는 모모코와 이치코는 독기와 근성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스스로 평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가는 길로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그것이 결점이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결점을 동력으로 끈질기게 전진한다.

‘재미있는 사람이 좋다.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특히 그 사람이 가진 결점의 한 부분이다. 올바름이나 뛰어난 것은 나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람들의 상식에서 일탈된, 보통 결점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 사람의 캐릭터를 잘 느낄 수 있다. 내 영화에는 보통의 좋은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도 평범하지 않다. 대체 나쁜 남자들만 줄기차게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무겁고 침울한 이야기인데도 영화는 활기차고 힘이 넘친다. 나카시마 데쓰야는 “지독하게 당하면서도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캐릭터에 감정이입됐다”고 말했다. “결점을 살아가는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사람을, 텐션을 아주 높게 표현하면 새로운 장르의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만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밥 포시의 뮤지컬이나 팀 버튼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무려 70곡의 노래가 흘러나오며 관객을 계속 새로운 상황으로 던져넣는, 뮤직비디오 연작같은 영화. 나카시마 데쓰야는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에너지와 꿈을 발견하고 활기찬 노래와 춤으로 형상화한다. 다만 제작된 지 14년이 지난 지금 보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남성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을 남성의 시각으로 숭배하는 지점 또한 찾을 수 있다.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파코와 마법 동화책>(2008)이 실패한 후, 나카시마 데쓰야는 변한다. 가나토 미나에의 소설이 원작인 <고백>은 암울하다. 전작들도 결코 밝지만은 않았지만 고통과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다. 그들의 미래 혹은 과거에 박수를 보내줬다. 하지만 <고백> 그리고 <갈증>은 전혀 다르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우리는 누구인지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고백>의 중학생들은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 자랑스럽게 자신이 죽인 아이의 어머니에게 살인의 과정을 떠벌린다. 살인을 한 사실이 아니라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 아들의 고통만을 안쓰럽게 여기는 어머니도 있다.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소녀마저 자신을 비웃는다며 살해하는 소년 A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고백>은 그의 갱생을 믿지 않는다. <고백>은 카타르시스조차 거부한다. 복수를 이루었지만 후련하지 않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희망찬 미래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1970년대 형사물 스타일로 질주하는 <갈증>은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다. 전직 형사 아키카주는 사라진 딸 카나코를 찾아 헤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카나코를 추적하던 아키카주는 경악할 만한 사실들을 알아낸다. 카나코는 친구들을 매춘과 약물에 끌어들였고, 뒤에 있던 조직까지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대체 왜? 좋아했던 친구를 자살하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려 했을 수도 있고, 아키카주의 가정 내 폭행 때문일 수도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분명하지 않다. 카나코는 우물 속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닥에 쿵 하고 닿으면 그곳은 앨리스가 도달한 이상한 나라인 것일까?

<갈증>을 보고 있으면 멍해진다. 대체 이유가 뭘까? 도저히 모르겠다. 그런데 알 것도 같다. 카나코를 쫓는 야쿠자는 말한다. 카나코는 지나치게 자유롭다고. 너무나 자유로워서 모든 규칙을 깨버린다고. 카나코는 이 세상이 혼란스럽다. 어떤 리얼리티도 느낄 수 없는 카나코는 세상이 금지된 모든 것을 행하고, 최소한의 금기조차도 무시하고 넘어버린다. 점점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하지 말라는 짓을 태연하게 해버린다. 약하고 위태로운 모든 것을 부숴버린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에.

최고의 CF 감독에서 거장 영화감독이 된 나카시마 데쓰야의 세계는 점점 어두워졌다. 인간의 결점을 응시하고 그들이 처한 절망에서 에너지를 찾아내던 나카시마 데쓰야는 이제 인간의 카오스를 정면으로 바라볼 뿐이다. 쉽게 희망을 말하지않는다. 나카시마 데쓰야의 세계는 암울해졌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만큼 세계가 혼란스러워진 것의 반영일 수도 있다.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더 어두워져도 좋을 것이다. 어둠의 끝은 결국 새벽이니까. 한밤에 들어선 나카시마 데쓰야의 영화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온다>의 실패 덕분에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지 않을까. 나카시마 데쓰야의 다음 영화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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