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모든 것> /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 상영시간 105분 / 제작연도 1999년
그녀는 모든 것이 과잉인 삶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다.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작별 인사도 없이 도시를 떠난다. 뱃속에 아기만 간직한 채. 다른 도시에서 그녀는 과잉과 정반대되는 삶을 산다. 간호사로 일하며 죽은 이의 가족을 설득해 다른 이에게 장기이식을 연결해주는 일을 맡는다. 17년 동안 그녀는 홀로 아들을 키운다. 차분하고 소박한 삶이었다. 아들 에스테반이 사고로 갑자기 그녀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영화는 아들이 죽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녀, 마누엘라(세실라 로스)는 아들의 생일날 함께 연극을 보러 간다. 공연이 끝난 후 아들은 여배우의 사인을 받으러 빗속을 뛰어가다 자동차에 치여 한순간에 생을 마감한다. 채 온기가 식지 않은 아들의 심장이 다른 이의 몸에 옮겨지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그녀는 슬픔을 삭이지 못한 채 17년 전에 떠났던 그 도시로 다시 돌아온다.
이후로, 영화의 대부분은 여전히 과잉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펼쳐진다. 다시 만난 트랜스젠더 친구 아그라도(안토니아 산후안)는 변함없이 각박한 삶을 살고 있고, 우연히 알게 된 수녀 로사(페넬로페 크루즈)는 봉사활동 중에 에이즈 감염자와 관계를 맺어 임신 중이다. 아들의 사고를 계기로 연을 맺은 여배우 위마(마리사 파레데스)와 동성 애인도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 파리 여행에서 가슴을 달고 돌아와 그녀를 혼란에 빠트렸던 남편 에스테반은 롤라라는 가명으로 이 도시 어디선가 몰락해가는 삶을 살고 있다. 심지어, 그는 로사를 임신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병의 근원인 아버지, 치유하는 어머니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발표하기 전까지 약 20년 동안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성은 거의 항상 ‘악’의 근원이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거짓과 악행을 일삼았다. 폭력과 추행을 일삼는 경찰관(<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 1980), 히틀러를 숭상하고 아내를 하녀처럼 다루는 택시 기사(<내가 뭘 잘못했길래>, 1984), 아내와 애인을 버리고 또 다른 애인과 도주하려는 노년의 성우(<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988)를 떠올려보라. 이들은 모두 수십년 간 스페인을 억눌렀던 프랑코이즘의 잔재들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발표한 이 영화에서 아버지/남성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게 쪼그라들어 있다. 권위적이라기보다는 무능하고, 폭력 대신 일탈과 방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그래서 주변을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 모든 ‘병’의 근원.
그렇다고 어머니/여성의 모습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초기 영화들에서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희생자이자 저항의 주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불안정하거나 자기모순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포스트프랑코 시대에서 빠져나온 스페인이 급격히 세계화되면서 전복해야 할 대상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가부장적 가치관과 권위주의 대신 가정의 상실과 개인의 소외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성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때로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어린 딸을 버리기도 하고(<하이 힐>, 1991), 때로는 알코올중독으로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비밀의 꽃>, 1995).
다행히 이 영화에서 어머니/여성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남성이 그저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전락해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숱한 상처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다시 손을 내민다. 복수하고 처벌하는 대신 용서하고 포용한다. 그리고 서로 연대한다. 주인공 마누엘라는 그런 여성들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녀는 주변의 여성들과 함께 남성들이 남겨놓은 상처들을 하나씩 치유하고 보살핀다. 아그라도의 얼굴에 난 상처에서부터 에이즈로 죽어가는 로사까지. 그리고 로사가 죽자 갓 태어난 그녀의 아이 에스테반의 양육을 맡는다. 그녀에게 주어진 세 번째 에스테반/남성이지만, 또다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과잉의 미학에서 위로의 시선으로
이 보편적 인류애 테마는 관점에 따라 다소 식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의 빛나는 재기와 탁월한 감각이 영화를 상투성의 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물론 영화의 서사구조는 복잡다단했던 전작들에 비하면 조금 밋밋한 편이다. 하지만 극중극 형식으로 삽입된 두 작품- 영화 <이브의 모든 것>과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 영화의 이야기와 끊임없이 겹쳐지면서 평범한 서사구조를 매혹적인 것으로 바꿔놓는다. 두 고전으로부터 가져온 캐릭터와 상황 설정 등이 수시로 비틀리고 전복되면서 새로운 관극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암시와 차용도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데, 가령 초반에 마누엘라가 장기기증 세미나에서 환자 가족을 연기하는 장면은 <비밀의 꽃>에서 비중 있게 다루었던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알모도바르 특유의 화려한 시각적 스타일 역시 풍부한 서정의 사운드와 결합되면서 이 영화에서도 강렬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전 영화들에서 과잉의 미학이라 할 만큼 과도한 원색 선호와 키치적 취향을 드러냈다면, 이 영화에서는 정교한 공간구성과 세련된 색상대비를 통해 한층 더 원숙해진 영상미를 보여준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붉은색은 욕망이나 열정보다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표현해낸다.
어찌됐든 이 영화를 여성영화라고 부르기엔 불편함이 따른다. 남성에게 희생당하는 것은 결국 여성이고, 그럼에도 여성은 끝까지 남성의 과오와 악행을 감싸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어머니’의 영화이고, 이 지점에서 알모도바르의 중심 테제였던 어머니=여성의 등식이 흔들린다. 그가 바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이고, 남성 혹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포용해주는 존재다. 어찌 보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근본적인 감정에의 호소가 지난 세기말 유럽에서 영화로 나왔다는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영화들은 냉소와 절망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내면세계에 숨어 개인의 신화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하나쯤은 나왔어야 했다. 세기말이지 않은가? 또 밀레니엄은 몰라도 근대 문명의 끝에 와 있다고 다들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이처럼 상투적인 멜로드라마 형식으로라도 우리를 위로해줬어야 했다. 알모도바르가 그렇게 했다.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함께 그는 오랫동안 벌여온 여성적 자아 탐구를 내려놓는다. 남성에 대한 깊은 증오로 시작된 자신의 ‘여성-되기’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일단락 짓는다. 이후로도 그는 여성에 대한 탐구를 계속 이어가지만, 그 시선은 훨씬 여유로워진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단순한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그만의 지점에서 자유롭게 그 모두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므로 끝나가는 한 세기에 대한 위로이자, 그와 우리 모두를 위한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