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리차드 쥬얼'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손을 다루는 방법
2020-05-06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라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눈에 비치는 세계에 반응하는 인물을 관측한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손에 쥐어진 도구로 세계에 대응하는 존재를 다룬다. 비슷한 시기에 톰 행크스라는 배우를 공유하더라도, 스필버그는 창문 바깥과 다리 너머를 응시하는 변호사의 눈빛을 바라보고(<스파이 브릿지>) 이스트우드는 허드슨강에 비행기를 불시착시키는 기장의 손짓을 포착한다(<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 도식적인 구분일 테지만 그만큼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손의 활동은 특별한 문제다. 그의 주인공들에게 손은 개인의 전문가적 선택으로 세계와 매개하는 물리적 접촉면이면서, 또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총잡이의 기억과 성흔(stigmata)이 새겨진 장소다. 그들이 더이상 총을 겨눌 수 없는 조건에 놓였을 때 수없이 변주되는 대체물들로 세계와 (재)매개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문제야말로 이스트우드가 구축한 픽션의 사라지지 않는 핵심이라 말할 수 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카메라를 든 손,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글러브를 낀 주먹이 그러하듯 이스트우드는 손에 붙들린 도구를 통해 한 인물을 다른 인물과 마주보게 하고, 나아가 세계의 표면에 접속시킨다. 거의 모든 픽션적 기능을 결여한 것처럼 보이는 <라스트 미션>의 주인공 얼조차 꽃과 운전대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행위의 당위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순간에도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이들의 동작에서 이스트우드적인 테마가 발견된다. 그들의 ‘영웅적인 결단’은 인과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손의 결정은 상황에 대한 인식에 앞선다. 최근의 예로 <설리>의 설렌버거는 비상착륙을 선택한 직관의 근거를 스스로도 확증하지 못한다. <15시 17분 파리행 열차>에서 열차 테러범을 향해 달려드는 세 친구의 비약적인 몸짓은 드라마와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난감한 문제로 남겨진다. 행위의 충동은 때로 동기를 잊어버리고, 인물의 심리적 기제마저 넘어서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트우드는 장 뤽 고다르와 더불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물을 다루는 손의 물리적 감각을 중요시하는 드문 작가일 것이다. 손에 쥐어진 사물의 역량을 잃어버린 채로 배회하는 이스트우드의 유령들과 찢어질 듯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두손으로 타자기를 두드리는 고다르의 신체는 희미하게 잔존하는 손짓의 중첩으로 모호한 상응의 몽타주를 이룬다.

미국이라는 전체를 향한 질문

애틀랜타올림픽이 열리던 1996년, 폭탄이 담긴 배낭을 발견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영웅에서 FBI와 언론에 의해 테러범으로 지목되는 안전요원 ‘리처드 주얼’의 실화를 각색한 <리차드 쥬얼>은 미묘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비품실에서 카트를 끌고 나오던 리차드 쥬얼(폴 월터 하우저)은 변호사 왓슨(샘 록웰)의 통화 내용을 엿듣는다. 인기척을 확인한 왓슨이 그에게 주의를 시키며 테이프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리차드는 이미 서랍에 테이프와 펜을 채워두었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짐짓 여유롭게 아래 칸 서랍도 확인해보라고 덧붙이는데, 서랍을 열면 왓슨이 즐겨 먹는 초콜릿 바들이 구비되어있다.

내러티브의 논리로 이해하자면 이 오프닝은 집요한 관찰과 대처를 고집하는 리차드의 유별난 면모를 보여주면서, 그가 왓슨과 맺게 될 우정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표상적 논리와 무관한 제스처의 불균형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리차드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의 손이 선제적으로 행해둔 결과를 확인한다. 손짓은 일찌감치 발생했고 영화가 시작하면서 화면에 도착하는 건 그것의 뒤늦은 지각이다. 행동이 발생한 시간 배치에 변주를 가하는 단순한 작법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지만, 이스트우드는 하나의 원인과 결과를 즉각적인 결합으로 제시하는 대신 행위와 지각 사이에 놓인 거리감에 주목한다. 리차드의 손은 주어진 의무와 요구를 수행했으면서도 현재 시퀀스에서 비가시적으로 물러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리차드 쥬얼>의 도입은 행동과 반응의 결과가 빚어내는 미세한 차이를 전제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스트우드의 근작들을 진정 부자연스럽게 뒤트는 건 이런 장면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개별적인 제스처들과 그러한 제스처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전체가 미세하게 불화하는 순간들에 있다. 이는 이스트우드가 실화 자체에 주목하는 만큼 현실의 사건과 재연된 이미지/퍼포먼스간의 어긋나는 질감을 의식한다는 측면을 환기한다.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실화를 다루지만 실존 인물의 연대기적 서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 더 구체적으로는 그 사건이 벌어지던 찰나에 이루어진 인물의 선택에 초점을 맞춘다. 이건 특별한 결정이다. 이스트우드는 장편영화로 구체화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물리적 시간이자, 카메라로는 관측할 수 없는 내면의 영역으로 수렴하는 대상에 주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 현장을 디지털 스크린의 이미지로 재연하는 <설리>의 시뮬레이션 시퀀스, 혹은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을 출연시켜 그들이 경험한 사건을 재구성한 <15시 17분 파리행 열차>의 결말부에서 픽션의 이미지와 실제 뉴스릴 영상을 교차시키는 편집이 동원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현실을 재현하는 통합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과 다른 현실, 이미지와 또 다른 이미지가 나란히 배치되는 것이다. 세계는 한 가지 이미지로 해명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픽션의 일부로 다시 목격하게 된 ‘사건’을 서로 다른 질감의 세부로 재연하고 반복 재생한다. 일차적으로 이는 한 사건을 둘러싼 집단들의 갈등을 드라마의 동력으로 삼기 위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한편의 영화는 고전적 형식에서 이탈해 비정합적인 구체로 변모한다.

그 가운데서도 <리차드 쥬얼>은 유독 분열적인 결과물이다. 시작한 지 30분 만에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긴박한 위기 상황과 사태 해결에 곧장 도달해버리는 이 영화는, 도입부가 지목하는 것처럼 곳곳에 산재한 행위들의 균열과 빈틈으로 나머지 1시간 30분을 구성하고 있다. FBI가 리차드를 조사한다는 정보를 알아챈 지역신문 기자 캐시(올리비아 와일드)에 의해 언론이 모든 상황을 폭로하고, 이에 FBI가 리차드를 붙잡기 위해 부리나케 그의 집에 당도하기까지의 장면의 연쇄를 떠올려보자. 미국의 법과 언론이 파괴적인 속도로 개인의 집 앞에 도달할 동안, 리차드는 정작 아무런 정보도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반갑게 FBI를 맞이한다. 한쪽은 너무 빠르고 다른 한쪽은 너무 느리다. 두 집단의 조우라는 결과의 단면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조건과 과정은 터무니없는 부자연스러움을 수반하고 있다. 과연 한 공간에 마주한 숏과 리버스숏이 같은 세계의 표면 아래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차드 쥬얼>의 질문은 이러한 세부의 부정교합으로 조직된 미국이라는 전체를 향한다. 리차드가 취조를 받고 집에 돌아올 때, 그의 뒷모습을 찍은 픽션 카메라의 숏과 그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포착하는 뉴스 화면의 리액션숏은 헐겁지 않게 연결되는 걸까? 왓슨과 비서의 걸음을 애틀란타올림픽 200m 결승전의 실제 경기 영상과 교차편집하는 장면은 동일한 현실의 질감으로 수용되는가? 실제 리차드 쥬얼의 뉴스 인터뷰 영상 위로 그를 연기한 배우 폴 월터 하우저의 목소리를 삽입한 ‘한 장면’은 이물감 없이 매끄럽게 받아들여진 걸까?

분리된 질감을 통합적으로 식별하는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차드 쥬얼>은 미국이라는 가상의 영상-국가의 표면에 드러난 균열을 그려낸다. 전체와 전체를 형성하는 부분들은 일관된 집합으로 구성되기보다는 형식적인 (비)대칭을 구축한다. 미디어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발작적으로 리차드를 겨누고 있을 때, 리차드의 몸 안에서 심장질환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질병으로서의 미국, 혹은 미국이라는 병리학적 이미지는 리차드의 안과 밖에 퍼져 있다. 그러므로 이 병적인 땅은 두개의 지대로 분할된다. 리차드를 조력하는 소박한 공동체(리차드의 어머니, 왓슨과 그의 파트너 나디아, 리차드의 오랜 친구 데이비드)가 머무는 그의 집 내부와 그 바깥. 바깥에선 모든 시선이 리차드를 향하고, 법의 명제로 무분별한 침입과 도청이 행해진다. 역설적인 것은 FBI를 조롱하는 왓슨의 말처럼 그러는 동안 테러범의 표상은 얼굴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많은 시각장치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리차드 쥬얼>의 미국은 불가시의 눈먼 세계다.

그런데 정확히 보지 못한 것은 법과 언론의 편협한 시각만이 아니다. 이스트우드는 리차드가 폭탄을 발견한 그날의 시간에 미완의 이미지를 드리운다. 리차드는 사건이 발생했던 긴박한 순간을 꿈으로 재생하면서, 이름 모를 흑인 모녀의 얼굴에 시선을 맞춘다. 우리는 이 순간 눈에 들어온 흑인 어머니가 2명으로 집계된 폭발사고 희생자 가운데 한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사고 당시에 리차드가 명확히 바라보지 못한 얼굴이다. 리차드는 목숨을 구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아니라, 폭발을 피하지 못한 한 사람의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다른 기회가 있었을까? 리차드가 복통을 호소하면서도 병가를 내지 않고, 교대하고 쉬라는 동료의 배려를 거부한 뒤, 소란 피우는 학생들에게 제재를 가하기 위해 주변을 움직이다 폭탄이 든 가방을 발견한 것처럼, 다른 우연과 행위였다면 다른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트라우마로 귀환하는 죽은 흑인 여성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소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이 불안은 끝내 기각되지 않는다.

장 콕토는 오슨 웰스를 “어린아이의 모습을 두른 거인”이라 묘사한 바 있는데, 오히려 웰스는 배우로 출연하며 ‘노년의 거인’이 되려는 열망을 표출하던 것처럼 보인다. 과도하게 덩치를 부풀리고 압도적인 몸집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으며, 데뷔작인 <시민 케인>에서부터 20대의 신체로 말년의 노인을 연기하기도 했다. 유년의 기억과 노년의 몸, 어린아이의 상태와 거인의 크기라는 상이한 질료들로 그의 신체는 교란과 모순을 형성한다. <리차드 쥬얼>에서 이스트우드는 리차드의 뚱뚱한 몸과 어눌한 말투를 주시하면서 콕토가 거론한 웰스적 ‘유년기의 영화’에 근접한다. 리차드는 느린 속도로 걷고 반응하는 이스트우드의 전형적인 인물 유형과 다른 리듬을 갖는다. 그는 둔중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고, 순종적이면서 동시에 저항한다. 가령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왓슨의 당부에도 리차드는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FBI에게 끊임없이 신소리를 건다. 왓슨은 리차드의 이런 행동을 타박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며 팔뚝으로 입을 가린 채 웅얼거리는 리차드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의 그것이다.

그런데 이 유년적 남성의 정보는 오늘날 미국 사회의 테러범의 유형과 유사하다. 총기 사냥을 즐기고, 정의를 앞세워 관심받길 원하며, 몇 차례의 범죄 경력이 있는 백인 남성. 이러한 추론은 물론 FBI의 억측으로 판명되지만, 불투명한 세계의 표상적 질서 내부에서 영웅과 범죄자의 두 얼굴이 카메라의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지점에서 <리차드 쥬얼>은 <독일 영년>(로베르토 로셀리니, 1947)의 추락하는 어린아이의 신체 이미지, <엘리펀트>(구스반 산트, 2003)의 총을 든 소년의 이미지를 인용하면서 이같은 영화의 형상을 ISIS의 모병 프로파간다 영상에 담긴 소년의 이미지와 대응시키는 고다르의 ‘다섯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한손’의 영화인 <이미지 북>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소년들의 학살과 어린아이의 구원은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그 행위들이 교차하는 손을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맞부딪친 두손

<리차드 쥬얼>은 학습된 매뉴얼을 철저히 따르고, 국가의 가치와 신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던 유아적 인물의 내면 체계가 무너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상의 표면 위에서 여러 층의 질감으로 분리되는 리차드의 형상은 내부적 신념이 파괴된 분열하는 개인의 몸이면서, 자신의 믿음과 국가의 가치를 연결시킬 상징적 매개를 찾지 못한 텅 빈 몸이다. 할리우드 장르에 내재한 붕괴의 조짐을 “카메라와 세계, 의식과 세계 사이의 틈을 더욱 강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 발견한 영화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지적처럼, 리차드의 몸은 그러한 이중의 모순과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유년기의 끝은 성장을 보장하지도, 잃어버린 신념을 대체할 다른 가치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우리는 염원대로 경찰이 된 리차드를 마주하지만, 숏의 표면에 당혹스럽게 솟아오르는 건 그의 멍한 표정과 몇년 뒤 그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자막이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리차드 쥬얼>은 리차드와 나란히 앉은 작은 공동체의 집단 숏에서, 리차드와 왓슨의 투숏으로, 그리고 리차드의 단독숏으로, 최종적으로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공백의 자막으로 무심히 이행한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무관하게 프레임 내부의 활동성은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의심받던 영웅이 믿음을 확인하고 도덕적 승리에 이르는데, 세계는 불투명한 암흑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하지만 <리차드 쥬얼>은 세계의 어둠과 무게에 짓눌리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지탱하는 건 반복하건대 세계의 불투명한 접촉면에 대항하는 물리적 제스처들이다. 결말 직전에 배치된 감정적 클라이맥스는 이 사실을 증명한다. 식당에 마주 앉은 리차드와 왓슨에게 FBI 요원 톰(존 햄)이 찾아와 수사 대상에서 리차드를 제외한다는 결론이 명시된 서류를 건네준다.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는 왓슨의 목소리가 멈추면 상대방의 손을 맞잡는 두 사람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화면에 붙잡혔다 사라진다. 두손의 조우, 구체적으로 말하면 빈손의 조우다. 리차드와 왓슨이 나누는 이러한 손짓은 눈에 띄지 않게 스쳐 지나간 한 장면을 돌아보게 한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테이블에 앉아 사건을 논의하던 때에 자신은 테러와 무관하다는 리차드의 진술을 확인하고는, 하지만 확실한 신뢰를 담보하지 않은 채로, 서로의 손에 든 맥주병을 부딪치던 장면이다. 리차드가 모든 혐의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두 사람은 무엇도 지니지 않은 맨손으로 서로의 손을 맞댄다. 손짓을 교환하는 제스처는 이제 맥주병과 같은 물리적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비가시적으로 밀려난 손의 현존을 프레임에 붙잡는 순간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맞부딪친 두손으로 영화에 새겨진 좁힐 수 없는 간격의 어둠에 맞선다.

<그랜 토리노>의 월트 코왈스키가 실행하는 마지막 선택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의 빈손이라는 제스처의 형식이다. 평생 라이플총과 운전대를 잡아왔던 노인은 주머니에서 빈손을 꺼내들어 스스로의 희생을 연출한다.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시인과 퇴장의 형상이 그 자리에 그려진다. <리차드 쥬얼>은 <그랜 토리노>와 마찬가지로 이스트우드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제스처의 영화, 무엇보다 빈손이라는 제스처의 영화다. 물질로서의 영화가 어떤 형태로든 물리적인 매개를 거쳐 성립되는 것이라면, 이스트우드는 이 장면에서 문자 그대로 영화라는 육체의 빈손을 직시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두 개의 빈손을 마주잡게 하면서, 이스트우드는 그가 창조한 인물들의 손에 깃든 오랜 영화적 역학을 발견한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를 증언하는 하나의 이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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