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중학생인 애들을 축구 기계로 만들면 뭐 할 건데.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은 애들 기본기가 중요할 때야. 지금 애들은 기본기를 익히고 축구하고 놀 때야.” 시골 학교 축구부 감독 김수철(정웅인)은 우승으로 이어져야만 운동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에 이처럼 받아친다. <슈팅걸스>는 노력하는 과정이 괴롭지 않더라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다. 영화는 2009년 13명이 전부인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여중 축구부가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기계적인 훈련 대신 따뜻한 눈길과 인격적인 교육 현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한때 준비하던 영화가 중단되면서 마음고생도 많았다는 배효민 감독을 만나 시골 여자아이들의 축구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에 관해 물었다.
-각본으로 참여한 <유아독존>(2002) 이후 어떻게 지냈나.
=2006년에 장편 <진주라 천릿길>을 40% 이상 찍었는데 촬영이 중단됐다. 경남 진주에서 자란 배우 서진원이 각본을 썼고 <오! 수정>을 만든 미라신코리아가 제작을 맡았다. 한·중·일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였다. 일본인 야쿠자 두목의 아들인 남자주인공이 누군가에게 공격받거나 누군가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순수한 진주 사람들 속에서 인간 본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배우가 교체되면서 투자가 빠졌다. 영화를 그대로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다가 2~3년이 지났다. 그러던 중 삼례여중 축구부가 13명으로 2009년 여왕기 전국여자축구대회에서 기적적으로 우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학교를 방문해 김수철 감독을 만나 인터뷰했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썼다.
-<슈팅걸스>는 2015년 1월 촬영에 돌입해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출품, 2020년에 드디어 개봉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관객을 만나게 됐나.
=2009년 10월부터 동네에 숙소를 잡고 글을 썼다. 삼례읍 주민들과 잘 알아야 해서 함께 지냈다. 사실 시나리오는 3개월 만에 초고가 나왔으나 시골 축구부 이야기라서 투자가 여의치 않았다. 5년 동안 시나리오만 20번 고쳐 쓴 것 같다. 2015년 1월에 적은돈으로 우선 15회 촬영을 시작했고 2차 촬영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6년 1월21일에 마지막 촬영을 마쳤다. 2017년에 영화제에 다녀와서 배급사 몇 곳과 이야기를 했지만 상업적으로 승산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실은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실감이 안 난다. 5월 6일에 개봉하면 내가 삼례여중 축구부 아이들한테 약속했던 부분이 지켜진다는 데 안도한다.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 아이들한테 거짓말은 안 했구나 싶어서다.
-어떤 약속을 했나.
=선수 13명으로 체력적인 한계를 넘어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면 무언가 남다른 이야기가 있겠다고 느꼈다. 이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증명하고 싶은 뭔가가 있었고 그걸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배우들을 축구선수처럼 보이도록 훈련시켜야 했기에 2014년에 김수철 감독님께 부탁드렸다. 훈련에 들어간 지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아침, 김수철 감독이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울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울면서 운전해 삼례읍으로 내려갔다. 감독님의 제자들도 30명가량 조문을 왔다. 그중 7명쯤 되는 학생들을 승합차에 태워 납골당으로 데려다줬는데 그때 약속했다. 너희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꼭 만들겠다고. 여력이 안되어서 영화를 완성시킬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영화를 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상가에서 감독님의 부인도 내 손을 잡고 영화를 꼭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아이들인가, 감독 김수철인가.
=양분하기 힘든 것 같다. 우승한 건 아이들의 정신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지도자의 몫도 있었다. 누가 더 크게 보이고 누가 작게 보인다는 거 자체를 결정 못 하겠더라. 편집된 상태라 그렇지 촬영할 때는 아이들 이야기가 더 많았다.
-축구대회를 밤 장면으로 촬영했다. 어떤 의도인지 궁금하다.
=실제로 2009년 여왕기배 축구대회는 여름에 열려서 나이트 게임으로 진행됐다. 무더워서 낮에는 도저히 아이들이 시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도 그렇거니와 아무래도 영화로 만들기에는 나이트 게임이 관객의 집중도를 높일 것으고 생각했다. 실제 경기는 8월에 열렸는데 연출하면서 하늘에서 뭐라도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중생이 공을 차는데 비는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영화 속 캐릭터지만 아이들이 안쓰러울 것 같기도 했다. 비가 내리면 축구 경기가 아닌 전투가 돼버릴 것 같았다. 대신 눈이 내리면 환상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이 영화는 결승까지 갈 수 있다는 기대도 못 받던 축구부가 예선에서 진 팀을 상대로 결승에 이긴 이야기다. 13명뿐인 선수단으로는 체력적인 면에서 말이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눈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김수철 감독이 아이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한명 한명을 불러 부모를 잃었다거나 하는 불운한 가정 형편을 언급한다. 아픈 곳을 찌르는 대사인데 각본도 썼으니 묻겠다.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나.
=애초에 운동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모였거나 기계처럼 강압적으로 운동을 시켜 우승했다면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13명으로 우승했다는 건 아이들 사이에 정신적인 교감도 있고 아이들이 축구를 통해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게 있었다는 이야기다. 앞에 있는 공을 가지고 상대보다 열심히 뛰는 것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이겨내기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삼례여중 축구부에는 결손가정이거나 어려운 가정 형편 등의 이유로 학교가 싫은 애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삼례여중 축구부는 그런 아이들의 피난처였다. 보호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지역사회와 축구부에서 돌본 셈이다. 아이들의 결핍을 김수철이란 지도자가 감싸주지 않았다면 경기 결과가 좋지 않거나 그 결과에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려운 환경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겠지만 어른이 정면으로 맞서서 한번 이겨내자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도에서 탄생한 장면이다.
-촬영한 지 5년이 흘렀다. 그사이 배우들이 대학 가고 개명할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동안 관객의 감성이 달라졌을 수 있는데 걱정이 되지 않나.
=관객의 시선은 물론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관객의 요구를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아무리 큰 상업영화를 만들어도 관객에게 외면당하는 경우가 있고 아무리 작은 영화라 할지라도 호응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관객이 반응을 안 해주면 영화의 생명력은 없다고 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공개됐는가 하는 문제는 시장에 나가는 시점부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기작 계획은.
=사극이다. 시나리오를 1년 전에 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 봉수대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