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계기로 최근 몇년간 소개된 일본영화를 연이어 보면서 이들 영화에서 괜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처음에는 상실과 허무의 시대를 안간힘을 다해 버텨내는 인물에 대한 느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정작 그 시대를 버텨내고 있는 것은 허구의 세계 그 자체였다.
허무와 상실의 세계에서 버텨내는 삶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인물들은 모순적이다. 생동감이 넘치다가도 그 활기의 끝자락에서 씁쓸함이 우리를 덮쳐온다.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세 남녀가 클럽에서 맘껏 노는 장면이다. 특히 여주인공 사치코를 연기하는 ‘이시바시 시즈카’가 클럽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순간은 여느 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영화적 쾌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중력을 지웠기에 가능한 생기다. 시즈오(소메타니 쇼타)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 이후 그들은 여전히 어울려 놀지만 그들에게는 그 이전의 자유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의 중력이 그들을 짓누른다. 그들은 현실의 무게가 사라진 무중력의 공간에서, 그 너울에 따라 일렁거릴뿐이다. 현재의 좌표도 미래의 이정표도 필요로 하지 않는 표류자로서의 삶. 이들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영화를 감싸고도는 허무와 무기력의 정서를 버텨내는 방식이고, 이는 이 작품이 최근 일본 (청춘)영화에서 곧잘 표출되는 ‘시대의 감각’과 그 ‘정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최근 일본영화가 이 허무와 상실, 무기력의 정서로 가득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버티고자 하는 인물들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묻는 영화들을 따라가려 한다.
참을 수 없는, 관계의 두려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인물의 정서를 온전하게 전달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이는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개를 보여주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감독 미야케 쇼의 목표가 그것이었다면, 이 작품은 자신의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다가선 작품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두 남자와 한 여인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리지만, 그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심리적 긴장은 느슨한 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삼각관계의 한축을 이루는 ‘나’(에모토 다스쿠)가 이 관계의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데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미야케 쇼는 이 삼각관계가 형성되려는 순간순간마다 ‘나’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가령, 세 사람이 서로 처음으로 마주한 날 밤 ‘나’가 사치코와 시즈오 사이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장면, 그리고 술 취한 시즈오가 사치코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하는 장면 등에서 미야케 쇼는 반복적으로‘나’의 얼굴을 비춘다. 일반적인 연출이라면, 우리는 ‘나’의 얼굴에 그 상황에 어울리는 ‘리액션’이 새겨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반응은 단순히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딱 거기까지다. ‘나’의 감정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또는 표현하지 않는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서점의 점장과 밤에 만나기로 했다고 사치코가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나’는 별다른 리액션을 보이지 않는다. 리액션이 감각의 반응이라면, ‘나’는 그 감각을 두꺼운 갑옷으로 감싼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갑각류에 가깝다. 그것이 사치코가 ‘나’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질척거리지 않으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 또는 ‘나’가 이 허무와 상실의 세계를 버텨내는 방식이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를 경유하면 최근 일본영화에 흐르는 정서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도쿄의 밤하늘은…>에는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기운이 가득하다. 미카(이시바시 시즈카)는 자신을 버리고 자살한 어머니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호스피스 병원에서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한다. 마치 죽음과 계속 마주함으로써 상실에 익숙해지기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다. 신지(이케마쓰 소스케)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공사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죽는가 하면, 자신에게 늘 자상한 표정으로 책을 빌려주던 옆집 할아버지도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난다. 그들의 곁에는 죽음이, 그리고 그로 인한 상실감이 함께한다. 이들은 이 상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에 늘 뒷걸음친다.
그들이 마주하는 갑작스러운 죽음, 또는 상실에는 이유가 없다. <도쿄의 밤하늘은…>뿐만이 아니라 <아주 긴 변명>(2016)에서도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이 등장하고, <아사코>(2018)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시즈오의 어머니 역시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인과율에서 벗어난 세계 앞에서 우리의 삶은 모호해진다. 그리고 그 모호함에서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허무에 빠지고, 또 그만큼 무기력해진다. 최근 일본영화의 인물들은 언젠가 갑자기 떠날 타인 앞에서, 그 관계의 감정에 풍덩 하고 빠져들지 못한채 망설이고 주저한다. 그래서 그들은 외롭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도쿄의 밤하늘은…> 등처럼 자신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타인과 관계하는 청춘들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서 발견되는 무감각한 갑각류의 삶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자신의 감각을 갑각으로 둘러싸는 것. 상실 자체가 내 감각에 닿지 못하도록.
허무와 우연의 존재
최근 일본영화의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뜬금없이 김연수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떠올랐다. 소설 속에는 ‘허무와 우연의 존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광주 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광주에 있었더라면 그들도 죽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346쪽) 이 소설이 출간된 건 2007년이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2015년 무렵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렸다. 그것이 광주든 세월호든 간에 감당하기 힘든 재난과 상실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허무와 우연의 존재’가 될 것을 강요한다.
최근 일본영화에서 발견되는 인물들의 정서 역시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이다. <두더지>(2011), <너의 이름은.>(2016)처럼 보다 직접적으로 이 사건을 상기시키는 작품도 존재하지만, 지금 내 관심은 동일본 대지진과는 거리가 있으나, 그것이 변화시킨 세계의 공기와 호흡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 그로 인해 작품에 흐르는 상실과 허무, 무기력의 정조를 버텨내야 하는 인물들, 그리고 이를 통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본 사회의 정서 구조에 있다.
트라우마적 사건은 그 이전과 그 이후를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가르는 기점이다. 사건, 그 이후의 사회는 그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와 윤리를 요구한다. 달리 말해 겉으로는 과거와 유사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조건의 세계가 우리 앞에 도래했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할때 우리는 혼란스럽다. 최근 일본영화의 인물들에서 곧잘 발견되는 허무와 무기력의 태도는 바로 이 혼란 안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다. 주인공 아사코(가라타 에리카)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나 키스를 하는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바쿠가 갑작스레 사라지고 2년이 지난 뒤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마주치며 혼란에 빠진다. 아사코의 혼란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사귀기를 결심하며 이내 안정을 찾는 듯 보이지만, 그런 그녀 앞에 바쿠가 나타나면서 아사코는 다시 혼란에 휩싸인다. <아사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바쿠가 나타났을 때 료헤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나섰던 아사코가 이내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이다.
<아사코>는 삼각관계의 로맨스영화처럼 보이지만, ‘AsakoⅠ&Ⅱ’라는 영문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아사코의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모든 것이 동일해보이지만, 결코 동일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바쿠와 료헤이를 같은 모습으로 설정하고, 아사코가 두 사람에게서 동일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이유다. 영화의 엔딩에서 아사코와 료헤이는 위와 아래나 앞과 뒤의 위계화된 구도가 아니라 수평적 구도로 자리를 잡는다. 어느 날 갑자기 바쿠가 사라진 삶을 견뎌야 했던 아사코,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사코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삶을 마주해야 했던 료헤이. 결국 동일한 경험을 한 두 사람이 함께 동일한 선상에 선 것이다. 그들은 이제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너를 영영 믿을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료헤이의 대사는 그들의 현재(와 미래)가 결코 과거와 동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하지만 자명했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진 불안의 삶 속으로 던져졌다. <아사코>는 이 불안 속에서도 두 사람을 결별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 불안과 함께.
또 다른 서사의 시작, 또는 재귀적 암시
<아주 긴 변명>에서 아내가 죽음의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남편의 머리를 손질해준 뒤 남긴 마지막 한마디. “뒷정리를 부탁해.” 뒷정리는 언제나 상실, 또는 사건 그 이후의 삶에 던져진 이들의 몫이다. 실제로 <아주 긴 변명>의 엔딩은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가 유품을 정리하는, 그러니까 남겨진 것들을 ‘뒷정리’하는 모습이다. 정지연의 표현을 빌린다면(<씨네21> 1093호, <아주 긴 변명>, 한 남자의 뒤늦은 성찰 혹은 성장담), 이 뒷정리(또는 애도)는 “처음으로 아내의 존재와 부재, 자신에게 닥친 비극과 슬픔,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삶의 문제를 내면으로부터인지”하는 “긴 시간들을 통과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인물들은 ‘뒷정리’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너의 새는노래할 수 있어>는 그 엔딩에서 ‘나’의 사랑 고백 앞에서 사치코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미야케쇼에게 중요한 것은 사치코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영원할 것만 같던 그 여름의 끝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치코의 선택이 무엇이든 간에, ‘나’와 사치코는 <아주 긴 변명>의 사치오가 통과해야만 했던 그 긴 시간의 터널 앞에 도착한다. <아사코> 역시 영화가 끝맺는 순간은 아사코와 료헤이가 이 터널 앞에 도착했을 때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엔딩에서 ‘나’는 시즈오와 사귀겠다는 사치코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이 고백의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영화다. ‘나’는 영화의 시작에서처럼 숫자를 세며 사치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채 20도 채우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간다. 내연관계인 점장을 만나러 가는 사치코의 뒷모습을 흘깃 뒤돌아볼때, 그리고 그녀를 모욕한 서점 동료를 향해 몸을 날릴 때부터 타자를 향한 ‘나’의 감각이 되살아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치코에게 달려가는 이 뜀박질만큼 이토록 절실한 순간은 그의 인생에 없었을 것이다. 사치코의 선택이 무엇이든간에, ‘나’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해 절실하게 달린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는 이렇게 그가 감내해야 할 시간의 터널 앞에 선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비롯해 <아사코>, <호박과 마요네즈>(2017), <도쿄의 밤하늘은…> 등의 엔딩은 서사의 끝이기보다는 ‘또 다른 서사의 시작’ 같은 느낌을 준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2017)의 엔딩을 기억해보라. 외계인의 침략에 의한 지구 종말의 위기를 보여주던 영화의 엔딩은 절망적이다. 외계인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의 모습은 무기력과 허무 그 자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 절망의 끝에서 신지(마쓰다 류헤이)를 그녀의 곁에 남겨둔다. 어쩌면 이 엔딩은 상실과 허무가 치유될 수 없는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과 함께 머물 수밖에 없음을, 그럼에도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아사코>의 엔딩에서 그 불안 속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버티고 서 있는것처럼 말이다(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나는 <심야식당> 처럼 소소한 일상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장르의 유행도 이러한 정서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기 또는 그 속으로 퇴행하기).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그러하듯, 이 글에서 거론된 영화들은 대체로 허구의 힘으로 영화의 문을 닫지 못한다. 달리 말해, 허구의 세계가 그 자체의 서사적 논리로 자신만의 완결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 그것은 어쩌면 일본의 문화평론가 우노 쓰네히로의 지적처럼 허구에서나 가능하다고 믿었던 대지진이라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현실이 허구를 압도하게 된 결과일 수도 있다(<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그것이 대지진에서 유래했는지, 장기 불황 등의 사회적 요인인지, 아니면 그 밖의 또 다른 요인이 중층적으로 작용한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최근의 일본영화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허무와 상실, 무기력이 단지 인물만의 것이 아니라 ‘사건 그 이후’의 허구의 세계가 당면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건 이후’의 현실 앞에서 무력감에 빠진 것은 단지 인물이 아니라 허구의 세계 그 자체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곧잘 ‘인물의 성장’을 암시하거나 희망하는 형태의, 또는 인물이 또 다른 서사의 시작 앞에 설 때 엔딩을 맺는다는 것은, 허구가 자기 자신에게 거는 재귀적 암시가 아닐까? 언제나 그랬듯, 허구는 자신의 세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결국, 무력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헐떡이며 뜀박질을 시작한 것은 ‘나’만이 아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보고 있자면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삶의 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