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La Promesse /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상영시간 92분 / 제작연도 1996년
결말이 두려워 끝까지 보기 힘든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영화 중간쯤, 소년이 술집에서 양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노래를 부를 때 그렇게 가슴이 시릴 수 없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맞은 뒤였다. 미소 짓는 소년의 얼굴에 온갖 상념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소년이 어른들과 술을 마시며 크게 웃고 떠드는 장면부터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려고 이러는걸까? 어떤 비극으로 소년을 몰아가려고? 다행히, 영화는 내 예감을 배반했고 결말을 열어둔 채 끝났다. 소년은 폭력적인 양아버지에게서 도망쳤고 한치 앞도 모르는 현실에 내던져졌다. 이 소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비-장소 혹은 문명의 사각지대
영화 <약속>은 다르덴 형제의 세 번째 장편 극영화다. 이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벨기에 북부를 배경으로 주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전념했었다. 이 영화로 다르덴 형제는 세계 영화계의주목을 받으면서 단숨에 벨기에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로 부상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15살 소년 이고르(제레미 레니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고르는 정비소 견습생이지만 양아버지 로제(올리비에 구르메)의 조수 역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불법입국자들을 상대로 브로커 일을 하는 로제가 그에게 쉬지 않고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로제는 담배를 나눠 피우고 함께 술을 마시는 등 아무 거리낌 없이 소년을 성인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돈독해 보이던 이들의 파트너십이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관리하던 한 아프리카계 불법입국자가 건물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이다. 소년은 그를 병원에 데려가려 하나, 말썽이 생기는 걸 원치 않은 로제가 그를 산 채로 건물 밑에 묻어버린다. 이때부터 소년은 갈등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죽어가던 이에게 엉겁결에 그의 아내와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로제가 죽은 이의 아내를 사창가에 넘기려 하자 소년은 그녀와 함께 도망쳐나온다. 그리고 갖은 노력 끝에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벨기에를 떠날 수 있도록 기차표와 여비를 마련해준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기차역까지 그녀를 따라온 소년은 마침내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한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플랫폼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걸어가고, 그녀를 쫓아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영화 내내 거침없는 카메라 움직임과 생생한 현장음향으로 전달된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따라 건물과 건물 사이, 방과 방 사이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면서도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을 놓치지 않고 꼼꼼히 담아낸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공간은 끊임없이 절단되고 은폐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거리의 풍경도, 인물들이 사는 집의 실내도 온전히 보이는 법 없이 항상 분절되어 나타난다. 관객은 그저 삭막한 도시 구석 어딘가에, 부서지고 버려진 공간들 사이에 인물들이 숨어들어 있다는 것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비-장소’ 같은 장소들을 채우고 있는 이들은 말 그대로 주변인들다. 이후로도 다르덴 형제는 저학력 청년실업자, 소매치기 청년, 위장결혼 이민자 등 사회의 주변인들을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로 삼는데, 여기서는 불법입국한 노동자들이 그 대상이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비슷한 실패를 반복한다. 또 한결같이 위험한 대로를 무단횡단하고, 도시를 점령한 차량과 건물들의 기세에 눌려 구석진 곳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들은 비-문명적인 어떤 것, 원시적이거나 야생에 가까운 어떤 것에 맞닿아 있다. 닭의 창자를 늘어뜨려놓고 남편의 행방을 점치는 아프리카계 여인(<약속>), 숲속 바위 밑에 장화를 숨기고 흙을 파헤쳐 지렁이를 찾아내는 젊은 여성(<로제타>), 도심의 강둑 아래 빈터에서 기거하는 소매치기 청년(<더 차일드>) 등을 떠올려보라.
문명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암시한다. 서구 사회가 자랑하는 다양한 선진 제도들이 실상은 허점투성이의 공허한 구호일 뿐이라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 제도의 틈새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버둥치고 있다.
<약속>은 다르덴 형제의 가장 훌륭한 영화가 아닐 수 있다. 이후로 나오는 그들의 영화보다 좀더 거칠고, 좀더 감정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 영화를 특징짓는 주요 요소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일종의 원형(archetype) 같은 영화다. 저예산 제작, 동시대 사회문제, 비전문배우 같은 기본 요소들에서부터 핸드헬드 촬영, 파편화된 공간, 음악이 배제된 사운드 같은 형식적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무단횡단, 소형 이동수단에 대한 애착, 문명 안의 원시 같은 소주제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특징들을 다 담고 있다.
이고르 시리즈의 서막
나아가,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이고르 시리즈’를 여는 첫 작품이기도하다. 여러모로 이고르 시리즈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에 비견될 만하다. 트뤼포가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통해 앙투안이라는 영화 속 소년의 성장과정을 보여준 것처럼, 다르덴 형제 역시 배우 제레미 레니에를 통해 소년 이고르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두 시리즈 사이에는 크고 작은 차이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앙투안이 사회의 한 평범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과 달리 이고르는 결코 보통의 삶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르덴 형제 영화의 모든 주인공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보통의 삶’ 말이다. 어른처럼 야무졌던 소년 이고르는 시간이 흘러 소매치기와 구걸로 연명하는 거리의 청년이 되어 있고, 귀찮다는 이유로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몰래 팔려다 실패하기도 한다(<더 차일드>). 또 20대 후반에는 형편없는 몰골의 마약중독자로 변해 있으며(<로나의 침묵>), 30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몸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11난 아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비정한 아빠가 되어 있다(<자전거 탄 소년>).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양아버지에게 호출돼 아쉬운 표정을 짓던 그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보통의 삶에 끼어들지 못한채 여전히 세상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르덴 형제는 평생 단 한편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슷하면서도 매번 다른 그의 작품들은 차곡차곡 쌓이면서 거대한 하나의 영화-세계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고르 시리즈는 그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이자, 가장 가슴 아프고 쓸쓸한 이야기다. 언젠가 멈출 그들의 그 거대한 필름을 제대로 탐험하기 위해, 그들이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했던 시대의 구석들을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는 이 소년의 삶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