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김아송)는 가족구성원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문에 음식 주문을 포함한 타인과의 의사소통 대부분을 도맡아서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가족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이고 그들 사이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 같다. 자신도 청력을 잃게 해달라고 매일 소원을 빌던 와중에 보리는 우연히 TV에서 한 해녀의 인터뷰를 본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보리는 소원을 비는 대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을 택한다.
싱그러운 바다, 해사한 아이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집.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보리네 가족이 느끼는 현실의 무게는 보리가 청력을 잃은 척 연기하는 시점부터 점차 가시화된다. 보리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곧바로 변화한다. 수군대는 어른들과 “어차피 듣지도 못한다”며 보리를 외면하는 친구들. 보리는 달라진 주변 반응을 통해 그간 가족들이 부딪혀온 차별의 벽을 몸소 체험한다. 이처럼 영화는 보리가 농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인지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전면에 드러낸다. 더불어 관객이 아이의 시점에서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가족)’ 그리고 ‘장애에 대한 무시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라는 두 세계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 점이 비슷한 주제의 다른 영화들과 <나는보리>가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긍정적이고 따뜻한 문체를 끝까지 유지하는데 이는 여전히 보리를 변함없이 대하는 인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친구 은정(황유림)은 말 대신 보리의 손바닥에 글을 쓰며 “나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라고 묻고, 보리를 무시하는 친구들에게 대신 맞선다. 동생 정우(이린하)는 보리의 고충을 이해하며 축구 외에는 친구들과의 소통 창구가 없음을 토로한다. 부모님은 “네가 소리를 듣지 못해도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며 보리를 안아준다. 밝고 긍정적인 이들의 존재가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해당 인물들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가깝다. 영화가 “네가 소리를 들을 수 있든 없든 우리에게 넌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보리 아버지의 말을 반복해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극중 보리네 가족들은 수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영화를 준비하며 수어 선생님에게 따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대사 위주로 수어를 배워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촬영 현장에서 실제 집에서 쓰는 ‘홈사인’ 으로 수정이 들어가기도 했다. 촬영을 하며 배우들은 김진유 감독에게 많은 조언과 도움을 얻었는데,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인 김진유 감독이 수어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보리>는 김진유 감독 개인의 경험이 녹아든 작품이다. 2015년 ‘수어로 공존하는 사회’ 라는 행사에서 현영옥 농인 수어 통역사를 만난 감독은 그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님처럼 청력을 잃고 싶다는 소원을 빌곤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유년기에 비슷한 생각을 한 바 있는 김진유 감독은 현영옥 수어 통역사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제작을 고민하던 와중 2017년 강원영상위원회 장편제작 지원작으로 선정돼 <나는보리>를 제작하게 되었다. 김진유 감독은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영화에 담아냈다고 전한다.
2018년 서울독립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먼저 선보인 <나는보리>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도 제24회 독일 슐링겔국제영화제 관객상&켐니츠상 2관왕, 제18회 러시아 스피릿 오브 파이어 영화제 유어 시네마섹션 최고 작품상, 제20회 가치봄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많은 관객에게 보리 가족의 따뜻한 웃음을 전했다.
CHECK POINT
강릉의 아름다운 전경
강릉 출신의 김진유 감독은 익숙한 강릉 주문진을 배경으로 <나는보리>의 촬영을 진행했다. 주문진 시장에서 장을 보고 강릉 단오제 축제 거리에서 나들이를 즐기는 보리 가족의 즐거운 한때가 푸른 바다의 전경과 잘 어우러진다.
아역배우들의 활약
<나는보리>는 아역들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김아송 배우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에 이어 보리 역으로 다시 한번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김아송 배우 외에도 동생 정우 역의 이린하 배우와 보리의 곁을 든든히 지키는 친구 은정 역의 황유림 배우도 각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농인 관객을 고려한 자막 상영
<나는보리>는 전국 상영관에서 자막 상영으로 개봉한다. 이를 통해 수어를 모르는 관객의 이해를 돕고, 농인 관객도 극장에서 편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