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많이 모자라지만 참 맑은 친구, '사냥의 시간'의 소년성에 대하여
2020-05-20
글 : 송경원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라인]

이상한 표현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솔직담백한 영화였다. 내겐 <사냥의 시간>이 마치 <구니스>(1985) 같은 10대 소년들의 어드벤처물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것과 보여주는 결과물,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 사이의 격차에 대해 살펴보고자했다. 때로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보다 그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윤성현 인 원더랜드

“재밌네.” 이 한마디 대사는 <사냥의 시간>의 빛과 그림자, 과장된 평가의 콘트라스트를 선명하게 가르는 핀 포인트 조명이나 다름없다. <사냥의 시간>의 이야기는 대체로 말이 안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안되는 장면은 한(박해수)이 준석(이제훈)을 놓아주는 순간이다. 조직의 해결사이자 윗선의 비호까지 받는 킬러 한은 지하 주차장에서 준석 일행을 몰아붙이고 제압한다. 두명의 친구,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가 기절해 있는 사이 준석은 한과 일대일로 마주한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채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서 준석의 선택은 죽음을 받아들이듯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다. 이때 한은 사냥감으로서 준석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5분을 줄테니 달아나보라고 기회를 준다. 부디 실망시키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결정적인 순간 킬러가 뜬금없이 꺼낸 중2병 같은 대사.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걸 용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갈린다.

한이 준석을 살려주는 이유는 한번도 제시되지 않지만 아마도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사냥 자체가 목적이 된 한은 이제 흥미를 자극하는 사냥감을 원한다. 대개는 죽음을 앞두고 변명하거나 끝까지 달아나려 하는데 눈앞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사냥감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에 한은 준석을 놓아주고 상황을 즐기고자 한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정황들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죽음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짓눌리고 압도당한 한 청년의 맑은 얼굴이다. 공포에 땀범벅이 되고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도 문득 맑아지는 얼굴. 죽음 앞에서(물론 당연히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이 투명한 표정을 함께 목격하는 행위. 이상한 표현이지만 거기에 <사냥의 시간>의 본질, 기묘한 매력이 맺혀 있다.

스토리란 무엇인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어색하게 들릴 게 분명한 표현을 하나 더 덧붙이겠다. <사냥의 시간>은 솔직한 영화다. 안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과장된 조명과 사운드에, 장르영화의 장치와 패턴들로 가득한 이 영화엔 썩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럼에도 윤성현 감독이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 인물이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을 바라보자면 순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인물들은 감정과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상황이 닥치면 곧장 반응한다. 하나의 상황에 하나의 반응. 대신 제법 빠른 속도로. 그뿐이다. 여기엔 복잡한 계산도, 감춰진 의도도 보이지않는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이 영화는 준석의 액션과 그에 대한 리액션으로만 이뤄진 단순 연쇄반응이나 다름없다. 막연한 해피엔딩을 꿈꾸던 소년이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 던져졌을 때 덜 자란 어른아이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공포, 긴장,부질없는 저항. 그게 이 영화의 전부다.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혹평 대다수는 이 영화의 부실한 이야기와 개연성을 지적한다.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은 어설프기 짝이 없고, 전개되는 상황은 헐거우며, 이야기 구조가 1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다.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때와 달리 인물의 심리에 깊숙이 파고들지 않고 정황을 제시는 하되 관객을 설득시키는 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흔히 말하는 개연성, 인물의 동기나 논리적인 정합성으로 따지면 납득되지 않는 행동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가 매달리기 마련인 그 흔한 트릭, 복선, 내러티브상의 함정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 모든 총합이 내러티브의 부실로 곧장 이어지는 건 일종의 비약 내지는 착시다.

<사냥의 시간>의 내러티브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면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일대일의 대응이라고 말해야 한다. 약간의 호의를 담자면 솔직함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치명적인 구멍들을 발견했고 그것을 차마 견디기 힘들다면 오히려 관습의 착시에 빠졌기 때문일 거다. <사냥의 시간>은 준석이란 인물의 특성에 맞춰 그저 직관적이고 단편적인 반응들을 나열해나간다. 준석은 젊은이의 특질이 모인 하나의 표상이다. 그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한없이 불안해 보이면서도 이끌리는 건 실패마저 긍정하고싶은 해맑음 탓이다. 구김살 없는 솔직한 욕망 사이 자잘한 흔들림의 시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매혹이다.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걸 감추지 못하는 준석과 친구들의 반응은 1차원적이고 맑고 투명하다. 보여주는 것에 굳이 필터를 씌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영화는 관객을 빨아들이기 충분하다. 그럴만한 흡입력 있는 장면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단순할 리 없다고, 여기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기대(혹은 보정)를 하는 순간 우리는 장르 혹은 이야기라는 이름의 함정에 빠진다.

장르영화의 패턴을 준거기준으로 볼 때 <사냥의 시간>은 실패다. 응당 제공해야 할 기댓값들을 거의 빠짐없이 배신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왜 이들이 주목받아야 하는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들인지 제시하지 못한다. 왜 이들이 반드시 도박장을 털어야 하는지 설득하지 않고 인물들의 전사(前史)나 배경도 상당 부분 생략해버렸다. 그러다보니 말이 안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애당초 말이 되는 세계란 무엇인가. 말이 되는 세계는,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한다. 영화에서 이야기란 논리적인 정합성의 세계이며 설명되지 않는 영역은 배제시킨 닫힌 세계다. 내러티브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야기의 완결성을 추구한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하나의 경로이자 현실의 은유다. 하지만 현실을 모방하는 방식은 이야기 이외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며 어떨 땐 이야기가 조밀할수록 현실로부터 멀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이야기는 종종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다. <사냥의 시간>의 서사를 굳이 평가하자면 가치중립적으로 단순하다. 대신 단선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 있다. 영화 초반 기훈은 “마약에, 총에 이게 말이 되냐?”라고 현재 상황을 푸념한다. 그 말 그대로 이건 말은 안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현실 역시 대부분 현상이 있을 뿐 설명되지 않는게 다반사다. 오히려 불가해한 상황의 단편만을 체험하는 것이 더욱 실감에 가까운 법이다. 설명되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이 문득 나를 덮쳐올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사냥의 시간>이 집중하는 건 바로 그 반응들이다. 이 영화는 서사의 행간을 추측하거나 관객의 머릿속에 복잡한 미로를 설계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과 반응에 오롯이 집중한다. 다른 말로 장면의 뉘앙스를 채워놓는 데 공을 들인다.

비현실의 껍질을 쓴 현실, 악몽의 시간

그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사냥의 시간>은 한마디로 탈출 불가능한 악몽을 선사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악몽같은 현실을 꿈의 감각으로 전이시킨 장면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공간마다 선명한 필터가 끼워져 있다. 도식적일 만큼 과장된 영화 속 색감은 현실이 아닌 어딘가와 같은 느낌을 쌓아나간다. 불투명한 현실을 반영하듯 희뿌연 안개 속 전경으로 시작한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공간을 황색으로, 조력자의 공간을 푸른색으로 메워 구분한다. 자질구레한 설명이나 설정이 필요 없이 색으로 표상된 장면들은 유치할 만큼 솔직하다. 이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다가올 땐 검붉은 조명으로 긴장감 그 자체를 인물의 피부 바깥으로 꺼내 입힌다. <사냥의 시간>이 불안을 전염시키는, 그러니까 관객을 설득시키는 방식 중 재미있는 건 마치 그려진 애니메이션처럼 정확하고 맑게 상황을 지시해준다는 데 있다. 이건 실사영화이지만 그 뿌리는 사실 만화, 정확히는 한칸(한 장면)에 한 가지 감정을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명랑소년만화에 가깝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마치 <사냥의 시간>은 ‘스토리는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빈약하지만 장면의 밀도와 긴장감으로 채워진 영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애초에 스토리와 형식이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의 정보, 사건의 흐름과 연결, 캐릭터의 심리 따위를 스토리라고 기능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 정말 그러한가. 영화를 말하는 데 스토리만을 따로 추출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 작업인가. 관점을 바꿔야 한다. 장면이 곧 서사이고, 배우의 표정이 서사이며, 숏과 사운드의 결합방식 역시 서사의 일부다. 그것을 서사와 형식으로 따로 분리해서 다루는 순간 소모적인 논쟁의 헛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가령 이 영화를 두고 ‘악몽과도 같다’라고 말하는 건 준석의 악몽이 수시로 끼어들거나 꿈속을 헤매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수사적인 비유라기보다는 영화가 꿈의 재현 방식을 고스란히 닮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에 가깝다.

<사냥의 시간>의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이 영화의 환상적인 표현들이 사용되는 모순된 방식에 있다. 영화 초반 준석 패거리가 도박장을 터는 과정은 얼핏 전문적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년이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이들은 낙관적인 전망과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전반부의 분위기는 마치 모험영화처럼 두근대는 일탈행위들로 채워져 있고 그 장면들을 재현하는 카메라는 비교적 사실적인 톤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다 한의 등장을 기점으로 영화는 추격 공포물로 색을 바꾼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반부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준석 일당의 착각임을 알 수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무모한 범죄를 저지르고 우연히 성공해버린다. 그러다 진짜 현실, 그러니까 한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폭력이 자신들을 죄어오자 전반부의 환상이 벗겨지면서 패닉에 빠져버린다. 도박장까지 털어버린 준석 일행이 한으로 상징되는 진짜 현실 앞에서 무력해지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때 영화 전후반의 온도 차이가 재미있다. 전반부는 비교적 사실적인 톤을 유지하는 반면 후반부는 온통 공포스러운 붉은색 조명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사냥의 시간>은 꿈과 환상을 다룰 때 도리어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현실을 다룰 때 마치 비현실인 양 포장한다. 홀로 떨어진 상수(박정민)가 한에게 당할 때 붉은 조명 아래 던져두었다가 바로 이어지는 준석의 꿈속 불꽃놀이 장면에서 사실적인 화면이 제시되는 연결은 묘한 감흥을 자아낸다. 비현실이 현실처럼 묘사되고,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역전된 세계. 그건 아마도 준석의 감각일 것이다. 준석에게 탈출구 없는 미래는 그야말로 악몽이나 진배없다. 사실 감옥을 다녀온 준석은, 그곳에서 차근차근 적응해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사람이 어느 날 불현듯 망가져버린 미래에 불시착한 존재다. <사냥의 시간>의 서사가 전반적으로 순진하고 투명해 보이는 이유는 내적 갈등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공황으로 망가진 세계와 나의 대결이다. 악은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은 세계의 악의와 현실을 집약한 물리적 실체인 셈이다. 직접 구현되는 폭력 앞에서 준석이 냉혹한 현실을 자각할 때 영화는 비로소 악몽이 된다. 이것은 수사나 은유가 아니다. 우리는 직접 악몽을 목격하고 악몽의 감각에 둘러싸인다.

도피냐 돌파냐. 소년을 위한 원더랜드

그렇다고 <사냥의 시간>을 성공적인 작품이라 평가하긴 어렵다. 이건 명백한 실패다. 다만 그 실패의 지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이런 종류의 실패를 긍정한다. <사냥의 시간>의 패착은 목적지, 그러니까 의도와 방식의 불일치에 있다. 윤성현 감독은 영화 공개 전 인터뷰에서 <사냥의 시간>을 두고 “<터미네이터>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이에 있는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추격의 압박감이라는 면에서는 납득이 간다. 다만 <터미네이터>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이 간극은 지나치게 넓은 감이 있다. 우선 <터미네이터>와 비교하자면 장르적 쾌감, 볼거리, 스펙터클, 속도감 모두 미흡하다. 무엇보다 <사냥의 시간>은 거대한 서사나 스펙터클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어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의 반응에 집중하는 작은 이야기다. 하 지만 여러 가지 치장으로 인해 마치 거대 서사와 특색 있는 디스토피아 장르물인 양 착각하도록 만든 책임을 회피하긴 어렵다. 아마도 목적지는 <터미네이터>와 같은 장르 오락물이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이르는 방식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이야기의 장면화’에 집중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매 장면이 밀도 높은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화면마다 건조하고 간결한 숏들이 무수히 모여대담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숏은 매우 친절하고 정확하며 구체적이다. 그런데 그 영화적 활기에 홀려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길을 잃고 만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정수는 분명 미로가 없었는데 길을 잃어버리는 황망한 사태 그 자체에 있다. 코언 형제의 이야기는 불합리하다. 정확한 장면과 불합리한 이야기 사이 보이지 않는 마찰이 불안을 가중시킨 끝에 황량한 스크린 위로 2008년 미국의 황폐한 정신이 투영되는 것이다. 반면 <사냥의 시간>은 정반대의 영화다. 지나칠 만큼 단선적이고 솔직하고 명료하다. 윤성현 감독은 장르의 클리셰 위에 헬조선으로 압축되는 청년들의 불안과 방황을 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장면이 주는 긴장감의 밀도에 비해 그 연결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헐겁고 안일하다.

물론 불안의 정서를 불안의 이미지로 직접 전달하는 방식을 나쁘게만 말할 순 없다. 거기에는 언어로 담기지 않는 어떤 것, 이야기 바깥에서 영화가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장면화’의 욕망에는 조각난 장면의 뉘앙스로 모든 걸 갈음하려는 안이한 태도 혹은 허세를 지울 수 없다. 이건 요 근래 몇년 사이 한국영화에서 반복되는 나쁜 습관이기도 하다. ‘장면의 밀도’라고 하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거꾸로 말해 이런 장면들은 지나치게 형식에 의지하는 도피로도 읽을 수 있다. 장면의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추상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환상. 다시 말하지만 내러티브와 형식은 분리 불가능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지만 마주볼 수 없는 둘은 서로 조응하여 긴장을 자아낸다. 시대를 담아낸다는 건 그런 것이다.

<사냥의 시간>의 진짜 아쉬움은 여기에 있다. 장르적 기대(혹은 편견)를 걷어내고 본다면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무모하고 절박한 돌진, 그 불균질하고 어설프고 아슬아슬하면서 과해 보이는 자신감은 순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이 영화는 여전히 미숙하다. 비유하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아동 버전이랄까, 많이 모자라지만 참 맑은 친구는 불편할 정도로 구김살이 없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윤성현 감독의 특질인 것 같다. <사냥의 시간>이 재현한 젊은이들의 고민과 갈등은 10년 전 감성에 머물러 있다. 고색창연한 레퍼런스가 반복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문제인식이 그대로라면 그건 일종의 퇴행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사냥의 시간>은 근미래에 불시착한 준석처럼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2020년 우리 앞에 불시착했다. 소년의 맑고 깨끗한 얼굴과 허세가 제법 귀엽지만 언제까지나 원더랜드에 머물 순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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