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의 전작 '스틸 플라워' '재꽃'과의 비교
2020-05-27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들꽃들의 영화

사실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은 다르다. 사실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편집이 필요하다. 박석영의 영화들은 사실적이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예를 들어 <재꽃>(2016)에서 사기를 당한 명호(박명훈)는 분노에 가득 차서 철기(김태희)를 잡겠다고 쇠지레(빠루)를 들고 다닌다. 그런데 명호는 계단에서 쇠지레의 무게와 길이 때문에 쇠지레를 놓치고 쇠지레는 계단을 굴러가고, 명호는 떨어진 쇠지레를 줍는다. 쇠지레를 놓치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며, 관객이 명호가 지금 느끼는 분노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게 한다. 연출되지 않은 배우의사실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이 영화와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명호의 사실적인 행동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우며 인위적인가를 느끼게 된다.

<재꽃>에는 자연과 인위의 대립이 있으며, 이는 수직과 수평이미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초원이나 강물과 같은 수평의이미지들 뒤로 풍경을 압도하는 송전탑이나 아파트와 같은 수직의 이미지가 자리한다. 이 수평과 수직의 대립은 방랑과 정착의 대립이며, 운동(강물)과 부동(아파트)의 대립이기도하다. 영화의 갈등은 명호에게 딸 해별(장해금)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명호는 정착의 꿈을 꾸고, 부동산을 구입하려 하는데, 이런 명호에게 똑같이 결혼과 정착의 꿈을 꾸는 진경(박현영)이 사기를 친다. 이렇게 정착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들의 욕망은 악한 욕망이 아니다. 딸을 잘 키우고 싶어서 부동산을 사려는 명호의 꿈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명호는 정착을 하고 싶고, 정착은 존재의 부동을 만들어낸다. 명호는 해별에게 잠자리를 잡아서 준다. 소유를 위해서 존재의 운동을 제거하는 행위다. 그리고 해별은 잠자리를 다시 놓아주며 운동의 상태로 만든다. 진경과 명호는 부동과 수직을 지향하지만, 하담(정하담)과 해별은 수평의 운동을 지향한다. 진경과 명호의 운동은 인위적인 것이며, 이 우스꽝스러운 인위가 그들 자신을 파괴한다.

해소될 수 없는 노스탤지어

<재꽃>에서 명호가 딸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정착하고자 했다면,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정은경)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고향에서 영분이 정작 머무는 곳은 여행객들이 머무는 모텔이다. 영분과 고향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는 친구인 윤주였으나, 윤주는 이미 멀리 떠난 뒤다. 영분의 고향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합창반의 기억으로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애초부터 영분의 노스탤지어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노스탤지어란 결국 상실한 것들에 대한 감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분의 고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분이 돌아가고자 했던 기억이 합창반이라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은 자신의 딸 한희(장선)를 버린 기억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영분에게 자꾸만 난입해 영분을 그때 그 자리에 멈춰 세우는 죄책감이다. 그러나 영분은 한희를 만나고 한희에게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고향에서, 한희는 영분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그러나 영분이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깨달았을 때 영분은 다시 도망치려 하지만, 영분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 영분을 붙잡는 것은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언덕>에는 갑자기 난입하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분은 술집에서 술을 마신 뒤 모텔 방으로 들어와 한희의 사진을 보며 오열한다. 갑작스럽다. 그리고 이후 한희가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자 영분은 한희를 두고 떠나버리고, 한희에게 모질게 군다. 이 또한 갑작스럽다. 이런 갑작스러운 장면을 넣은 이유는 기억의 난입이 이처럼 갑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박하사탕>처럼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 그래서 인간은 직선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같은 시간들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 용진(김태희) 또한 마찬가지다. 용진은 아버지가 누워 있었던 빈 침대를 만지작거린다. 용진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연결된 존재들

죄책감이 인간을 멈춰 세우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고향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박석영의 인물들은 <재꽃>의 하담처럼 고향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다. 그는 민들레 꽃씨처럼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이동한다. 콘크리트 틈 사이로 갈 때도 있고, 평야로 갈 때도 있다.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가 바람이 불면 또다시 이동한다. 이 방랑자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방법은 탭댄스, 즉 예술이다. <스틸 플라워>(2015)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담은 바다로 간다.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고 파도는 언제라도 작은 하담을 삼킬 듯이 몰아친다.죽음이 어른거린다. 죽음 앞에서 하담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예술인 탭댄스로 바다에 저항한다. 하담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거대한 무엇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대결하며, 마침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 받아들인다. 거대한 숭고가 작은 하담에게 깃드는 것을 관객은 본다. <바람의 언덕>에도 방랑자인 영분이 반복하는 것이 있다. 노래다. 그저 술집에서 숟가락을 쥐고 부르는 노래지만 그곳이 마치 자신의 무대인 것처럼 그는 최선을 다한다. 하담의 탭댄스가 그를 계속 살게 했듯이, 영분의 노래 또한 그를 삶으로 이끈다. 영분에게 하담처럼 숭고한 순간은 없지만, 그 소박한 예술이 뿌리 없이 떠도는 영분을 영분으로 살아가게 한다.

이 노래는 영분과 한희를 이어주기도 한다. 한희는 영분의 노래를 듣고 영분이 자신의 엄마라는 걸 확신한다. 마술 같은 지점이다. 박석영의 영화에서 반동인물들은 의심과 오해를 반복한다. 예를 들어 <스틸 플라워>에서 횟집 사장의 애인은 단편적인 사실을 통해 하담을 오해한다. 이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다. 그러나 주동인물들은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믿는다. <재꽃>에서 하담과 해별이 탭댄스로 서로 이어지듯이, 노래는 영분과 한희를 서로 이어준다. 박석영 영화의 인물들은 이처럼 서로 연결된 존재들이다. 인물들이 그 연결성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영분이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갈 때 이 열차에 함께 탄 사람은 <재꽃>의 해별이다. 해별은 하담이 그러했듯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와 함께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 이들은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지만, 혼자는 아니다.

영분과 한희의 관계는 <재꽃>에서 명호와 해별의 관계와는 다르다. 명호와 해별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수직적인 관계를맺고 있지만, 영분과 한희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관계가 아니라 “나도 무서워”라고 서로 말하는 평등한 관계이며, 그렇기에 불안한 관계다. 끝나지 않는 운동을, 이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들꽃으로서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가 던지는 이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 뭐라 답하기가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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