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병> Tropical Malady /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상영시간 118분 / 제작연도 2004년
“너에게 줄게. 내 영혼, 내 육체 그리고 내 기억을. 내 피 모두를. 우리 노래를 불러, 행복의 노래.” 이 황홀한 사랑의 밀어(蜜語)는 한 남자가 마주보고 있는 호랑이 유령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는 어두운 숲속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한손에는 주머니칼을 쥐고 다른 손에는 랜턴을 든 채 타닥타닥, 이까지 부딪히며 떨고 있다. 그는 곧 죽을 운명(일것)이다. 그런데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얼굴이 이 대사와 함께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는다. 그는 그의 운명을 받아들인 걸까? 혹은 영화의 몇몇 장면이 암시하는 것처럼, 호랑이 유령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전생을 발견한 걸까?
우리는 동물도 인간도 아니다
영화 <열대병>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정오의 낯선 물체>(2000), <친애하는 당신>(2001) 등으로 이미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던 타이의 신예감독은 이 영화로 더이상 확장할 여지가 없어 보였던 영화의 지평을 한 차원 더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단,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경계가 다 무너진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유령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거나 영혼을 교환하고, 실재와 상상이 구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다. 또 시간이 해체되어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런 지표 없이 흩어져 있다. 영화의 이야기를 요약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중간에 삽입된 긴 암전을 중심으로 1부와 2부로 나누면 그나마 영화의 내용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1부는 타이의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군인 켕(반롭 롬노이)은 수색을 나갔다가 시골 청년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어색함 속에서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여느 연인들처럼 몇번의 데이트를 즐긴다. 운전을 가르쳐주고 통의 병든 개를 함께 병원에 데려가는 등 일상도 함께 나눈다. 켕이 다른 도시로 발령받아 떠나게 되자, 둘은 마지막 데이트를 한 뒤 미소를 나누며 헤어진다. 광활한 숲이 배경인 2부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호랑이 유령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자 군인 켕은 혼자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깊고 어두운 숲속에서 며칠 동안 호랑이 유령의 흔적을 좇아 돌아다닌다. 호랑이 유령은 특이하게도 1부에 나왔던 통의 외모를 하고 있는데, 켕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그와의 추격전을 즐긴다. 켕은 무력감과 두려움으로 서서히 지쳐가고, 어느 순간 갑자기 짐승처럼 엎드려서 네발로 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호랑이 모습을 한 유령을 만나 위의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난다.
이 난해하고 황당한 이야기의 저변에는 그러나 강한 전류 같은 것이 흐르고 있다. 바로 ‘원시성’의 자장(磁場)이다. 마치 영화 전체가 원시성이 발산하는 강력한 자기에 빨려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때 원시성은 단지 동물이 등장하거나 밀림이 배경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육체와 영혼, 실재와 상상 등 모든 것이 구분되지 않는 미분성(未分性) 자체가 인류 초기 문명의 특징이며, 일반 언어 대신 몸짓이나 소리 같은 신체언어로 소통하는 것 또한 원시 문화의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영화 곳곳에 타이의 샤머니즘적 요소들과 제의적 상징들을 삽입해 문명에 잔재하는 원시성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전위적 형식에 원시성에 대한 강한 동경을 담아내는 양식은 사실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작품들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한편으로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식적 실험들을 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발달한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로 비문명적인 것 또는 원시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이러한 초현실주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더해지는 그만의 고유한 불교적 사고가 기존 작품들과의 변별성을 만들어낸다. 특히 <열대병>에서는 이 복합적인 사유를 인간 모두에 공통되는 근원적인 사랑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한층 더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낸다.
갈애(渴愛)의 고통
이 영화는 수많은 상징과 암시들이 쌓여 있는 기호들의 집적물과도 같지만, 달리 보면 단순한 사랑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정확히는, 감독의 표현대로 ‘사랑’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1부가 두 남자의 사랑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룬다면, 2부는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2부에서 켕이 호랑이 유령을 쫓아 숲을 돌아다니는 행위는 희미해진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감독은 영화의 가장 기본적 형식인 빛과 소리를 이용해 사랑을 기억하는 행위의 무력감을 표현한다. 가령, 2부의 화면을 지배하는 ‘어둠’은 호랑이 유령을 쫓아 숲속을 헤매는 주인공의 막막함을 대변하는 동시에 과거를 소환해내는 기억 과정에서의 무력감을 가리킨다. 주인공이 겪는 공간(숲)과 상대(호랑이 유령)에 대한 인지의 어려움은 과거의 기억을 명증하게 되살려내는 일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것이다. 2부 내내 지속되는 독특한 ‘사운드’도 과거의 시간을 탐사하는 과정의 지난함을 나타내는데, 현장의 정글 소리와 전자음향효과를 결합한 다채로우면서도 충일한 사운드는 영상의 빈약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역설적으로 기억 행위의 무력감을 더욱 강조한다.
어찌됐든 무기력하고 빈한한 기억 행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과거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 사랑의 실체는 다름 아닌 ‘고통’이다. 1부의 평화로운 모습들은 단지 사랑의 표면에 불과할 뿐 그 이면에서는 치열한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던 것이다. 감독은 영화를 발표한 뒤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집착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갈망하지 않을 때 당신은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 이는 명백하게 불교적 사유에 해당한다. 불교에서 갈애, 즉 사랑의 갈망은 인간의 고통을 낳는 12지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갈애는 또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데,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갈망하는 이상 우리는 집착과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러한 갈애의 고통을 태초의 표현수단이었던 몸짓과 소리를 통해 전달한다. 호랑이 유령에 얻어맞고 내쳐져도 끝까지 매달리는 주인공의 몸짓, 호랑이 유령을 찾아 헤매며 내지르는 그의 울음소리,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서라도 상대를 만나고자 하는 애처로운 몸짓 등이 그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준 후 마침내 평온을 되찾는다. 모든 기억을, 자신의 피와 살을 다 바친 후에야 비로소 갈애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죽음을 암시하는 이 순간, 이승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사랑이라는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보다 더 처절한 사랑의 영화를 본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