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야 할 때가 있다, 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곤 한다. <사냥의 시간>을 만든 윤성현 감독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피상성의 시대에 남은 허망한 욕망
<사냥의 시간>의 준석(이제훈)과 그 친구들은 대만으로의 탈주를 꿈꾼다. 공교롭게도, <사냥의 시간>의 관람 이전과 이후에 본 영화 속 인물도 비슷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연희(전도연)는 신분을 감춘 채 일본으로의 밀항을 모색하고, 드라마 <인간수업>의 배규리(박주현)는 한국 반대편에 있는 호주로 탈출할 돈을 구하기 위해 부모를 협박한다. 그들이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를 꿈꾸는 것은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냥의 시간>의 대사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빈 가방을 돈으로 가득 채운 채 각자의 열차에 올라탄다. 낙원행 열차라 믿었지만, 그 도착지는 지옥이다. 제자리로 회귀해야 하는 허망한 탈출의 서사. <사냥의 시간>에서 영화 내내 겁에 질린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이 잔혹한 풍경과 마주해야 하는 이유를 좀처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체험하는 것만큼이나 이 무의미함이 고통스러웠다. 이 무의미한 체험의 세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표면에서 표면으로
<사냥의 시간>의 첫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매혹적이다. 편의점 안에서 옷에 대해 옥신각신하던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가 그 바깥으로 나오면 카메라는 인물에게서 벗어나 몰락한 도시를 잠시 비추다 차를 타고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잡는다. 그들이 편의점 문을 열어 거리의 풍경을 내 시야에 비출 때, 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느닷없이 비현실적 공간으로 비약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이질적인 세계로 갑자기 끌려들어가는 이 순간은 꽤 당황스럽다. 윤성현은 이 장면을 하나의 숏 안에 담는다. 세상은 하나의 숏 안에서 지속되는데, 그 숏 안에서 세계에 대한 나의 감각은 ‘커팅’하며 분리된다. 연속된 시선 속에서 이뤄지는 감각의 이탈, 또는 감각의 단절. 하나의 숏 안에서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세계. 평범한 세계에서 그냥 조금만 문을 열면 보이는 절망의 세상, 또는 또 다른 감각의 세상. 그것이 윤성현 감독이 바라보는 지금의 한국 사회다. 이 두 세계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윤성현이 그 도입부에 이러한 감각적 체험의 숏을 배치한 것은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사냥의 시간>이 어떠한 영화인지를 암시하는 구실을 한다. 실제로 <사냥의 시간>은 감각으로 경험하는 영화다. 이 장면 이후, <사냥의 시간>은 이 문 바깥의 절망의 세상에서‘만’ 질주한다. 아마도 많은 관객이 힘과 힘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는 이야기를 바랐겠지만, <사냥의 시간>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그로기 상태에 몰린 네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사냥꾼이라 믿었건만 그저 나약한 사냥감을 보게 될 때의 난감함. 우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야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을 보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이들을 바라봐야 한다. 숨통을 조여오는 공포 앞에 겁에 질린 얼굴, 그것이 우리가 <사냥의 시간>에서 목격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과 관객의 기대는 엇갈린다. 관객은 이러한 인물과 그가 겪는 사건에서 어떤 숨겨진 의미가 있기를 바라지만, 이는 윤성현에게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윤성현은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오로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얼굴과 겁에 질린 얼굴을 교차로 보여줄 뿐이다. 그 긴장감이 관객의 감각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냥의 시간>에는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것이 없다. 송경원 기자가 지적했듯이, 준석은 “젊은이의 특질이 모인 하나의 표상”으로 한없이 “맑고 투명”하며, 그렇기에 “여기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기대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씨네21> 1254호 프런트 라인 ‘윤성현 인 원더랜드 ’). <사냥의 시간>은 이면, 또는 심층이 없는 영화에 가깝고, 그런 면에서 <사냥의 시간>은 지금이 피상성의 시대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폴 들라니는 TV리모컨을 가리켜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도구라 칭했는데, <사냥의 시간>은 리모컨으로 TV채널을 이리저리 이동하며 그 화면의 이미지를 콜라주하듯, 스토리를 최소로 한 채 여러 영화의 인물과 이미지를 빌려와 순간순간의 긴장감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데 치중한다. <사냥의 시간>이 참조한 영화들은 영화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표면적 차원의 이미지의 콜라주 이상의 심층의 의미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그 결과, ‘헬조선’이라 불리는 지금의 현실에서 착안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냥의 시간>은 현실의 알레고리가 되지 못한 채 불안 과 공포의 감정만이 가득한 영화가 되고 만다. 달리 말해, 피상적인 표면이 심층의 현실을 압도한다. 또는 대체한다. 알레고리가 표면과 심층의 긴장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충분한 <사냥의 시간>에는 알레고리가 낄 틈이 없다. 심층을 잃고 피상적 차원의 시각적 유희로 충만한 영화는 곧잘 무의미해진다. 분주한 눈과 한가로운 사유. 그것이 준석의 겁먹은 표정도, 그 불안과 공포도, 한밤의 비명도 무의미한 세계 속으로 금세 휘발되고 마는 이유다.
법 바깥의 세계
나는 <사냥의 시간>을 보며 어둠의 도시에 준석(과 친구들)과 이들을 뒤쫓는 ‘한’(박해수)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들을 보라. 그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병원에서 총격전이 일어나도, 간호사의 비명 한번 들리지 않는다. <사냥의 시간>은 도시의 추격전이 펼쳐질 때마다 준석과 그 친구들을 홀로 내버려둔 채 시치미를 뚝 뗀다. 도시의 밤을 지배하는 미지의 존재인 한이 증명하듯, 그곳에서는 모두가 익명의 존재다. 어쩌면 한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지속시키는 것이 전부다. 그것이 한이 준석을 풀어준 이유다. 한은 그 대상이 준석이든, 또 다른 누구든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을 즐기려는 자신의 욕망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준석과 친구들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못한 채 황폐한 세계를 버텨내야 한다. 한에게 죽임을 당하는 총포상 주인(조성하)의 말처럼 ‘법 바깥의 세계’가 더 위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법 바깥의 세계는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세계다. 그것은 법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완전하게 주관적인 세계다. <사냥의 시간>이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영화라면, 이는 경제가 무너지고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가 아니라, 의지할 버팀목을 잃은 채 오직 생존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준석, 기훈, 장호는 성장을 멈춘 채 그 세상을 외면하려 한다. 그들은 <양철북>에서 성장을 멈춘 ‘오스카’와 다르지 않다.
법 바깥에서 홀로 생존해야 하는 인물을 그리는 것은 <인간수업> 역시 마찬가지다. 시즌의 말미에 등장했던 지수(김동희)의 꿈에서 학교에서의 가르침은 악몽으로 변주된다. 사람 좋아 보이고 입바른 소리 잘하던 지수의 담임선생 진우(박혁권)는 소지품 검사를 둘러싼 동료 선생과의 다툼에서 금세 무능해진다. 지수는 학교 바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름의 생존원칙을 정립한다. ‘법 바깥의 세상’에서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지수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한다. 영어와 수학에는 해석의 규칙이나 문제풀이를 위한 규범이 있지만, 법 바깥의 세상에서 지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지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답이 정답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가 여부다. 진우가 증명하듯, 가르침은 무력하다. 이들이 던져진 세계는 통합된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이 부재하는 세상, 그렇기 때문에 각자도생하며 그 붕괴된 가치를 스스로 정립한 규범으로 대체해야 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이야기했던 ‘거대서사의 몰락’ 이후의 삶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오타르는 거대서사가 작은 서사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잔재로 이해했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거대서사의 부재와 함께 우리는 개별적인 작은 서사들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던, 또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이야기의 틀을 잃었다. 거대서사가 몰락하며 그 자리가 텅 비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를 우리가 아직 갖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존해 의미 있는 삶을 꿈꿀 수 있을까? 아무 의미도 없이 생존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만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어쩌면 이야기(서사)의 존재 이유는 그 허망하고 무의미한 세계에서 우리가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해주는 일이 아닐까? 물론 <인간수업>이나 <사냥의 시간>의 인물들에게서 삶의 의 미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수업>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사냥의 시간>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욕망할 뿐이다. <인간수업>에서 지수가 바라는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규리의 가정사를 통해 증명된다.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낙원 자전거’와 그 주변의 거리처럼 그가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낙원’은 쓸모없는 낡은 간판으로만 존재한다. 즉,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바란다. 그렇기에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길을 찾지 못한 인물들에게 생존의 길은 (심층의 세계에 바탕을 둔) 그들의 의지나 투쟁의 결과물로 출현하지 못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영선(진경)이 사물함에서 우연히 돈가방을 발견하듯, <사냥의 시간>에서 총포상 주인의 형이 갑자기 등장하듯, 그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초자연적인 우연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허망한 제스처
<사냥의 시간> <인간수업>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휩싸이는데, 이들은 끝까지 자신에게 벌어지는 사건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한을 사건의 일부로 끌어들인 것은 준석이 설계한 범죄였지만 그 직후부터 그들은 한에게 끌려다니는 처지가 된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이들이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그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던 실타래 없이 미로 속에 던져졌고, 길을 잃고 헤맨 끝에 지옥에 당도한다. 결국, 제자리걸음. 인물들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대서사는 일종의 거인이었다. 우리는 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세계를 조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거인은 사냥당해 죽었거나 우리보다 못한 난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거인의 어깨를 잃은 우리는 세계를 전체로 조망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거대서사의 세계는 총체로 존재했지만, 그것이 몰락한 뒤 우리는 파편화된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 세계의 파편 조각에 몸을 베이고,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린다.
결국 이들 영화에서 인물이 처했던 ‘법 바깥의 세계’는 거대서사의 종말 이후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거대서사가 사라진 시대의 ‘이야기(서사)의 역할’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서사라는 이야기의 형식은 우리를 더 큰 세상과 만나게 하는 문이었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영화를 하나의 세계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그 심층과 대화하기를 멈췄을 때, 영화는 깊이를 잃고 평면이 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표면의 리얼리티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달리 말해, 더 넓은 세계로 향하던 입구와 출구 모두가 닫혔다.
거대서사의 몰락 이후 무의미한 세계와 싸우는 인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버닝>을 생각해보라. <버닝>의 종수(유아인)는 해미(전종서)가 사라진 뒤 마주한 미스터리한 세계에서 자신만의 눈으로 진실을 찾고, 그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그것이 어떤 내용의 글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거대서사가 사라지며 미스터리해진 세계를 자신만의 서사로 보충하려 하는 시도 그 자체에 있다. 그것이 종수가 무의미한 세계와 싸우는 방식이다. 종수는 세계를 미궁에 빠뜨린 벤(스티브 연)을 죽여 불태우는 절멸의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는 세상의 처음이라도 맞이하려는 듯, 또는 다시 태어나려는 듯 발가벗고 어디론가 떠난다. 비록 무모한 시도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이 아무것도 확증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종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미궁에 빠진 인물이 미궁을 부숴버리는 것, 그럼으로써 그 미궁에서 벗어나기. 그것이 종수가 무의미함과 싸우는 방식이다.
<사냥의 시간>의 준석 역시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한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자신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피해 더이상 도망치지 않고 그와 싸우겠노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준석의 이 결기는 좀처럼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준석의 이 다짐이 자기 기만을 위한 최면에 가깝다고 느낀 쪽이다. 피상적인 평면의 세계를 펼쳐나가며 심층의 세계를 애써 외면했던 <사냥의 시간>이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준 세계가 (준석에게)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그것은 자신이 삭제한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며 자신의 무의미함을 감추려는 것 이상이 아니다. 어쩌면 <사냥의 시간>은 피상성의 시대, 표면의 리얼리티가 심층(또는 거대서사)을 대체한 시대에 흔적으로 남은 것은 의미가 아니라 ‘의미에 대한 강박’일 뿐임을 보여준다. 여전히 그것이 존재하는 척하는 제스처가 필요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