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에 동료들과 함께 펴낸 책 <원본 없는 판타지>의 본래 제목은 ‘불투명한 아카이브’였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한국 근현대 문화사를 새롭게 조명한 이 책은 공식 역사에서 비가시화·주변화된 장면들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미완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아카이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애초의 제목을 단념한 것은 ‘불투명한 아카이브’라는 말이 ‘역전 앞’ ‘넓은 광장’ 같은 잉여적 표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자료의 누락과 해석의 공백으로 인한 가변성과 불완전성, 혼종성과 불투명성은 아카이브의 근본적인 성격 아닌가?
프랑스의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먼지 쌓인 18세기 형사사건 기록을 뒤질 때 마주치는 곤경을 묘사한다. 이를테면 이름, 나이, 주소 등을 묻는 경찰의 무미건조한 질문에, ‘무지렁이’ 하층민들은 결코 간단히 답하는 법이 없다.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르는 사람, 인쇄체 글자만 읽을 수 있는 사람, 이름을 쓸 줄 몰라 십자가 표시로 서명을 대신하는 사람 등 ‘교양’의 양태는 제각각이다. “말하는 방식이 곧 사건”인 이유다.
그뿐인가. 누군가의 진술을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은 기록은 눈으로 보면 해독 불가능하지만 소리 내 읽어보면 이해된다. 종이 질감이 여타 문서와 다른 특정 문헌이 사후에 끼워넣어진 것임을, 글자만 추적하는 ‘눈’보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먼저 안다. 가지런히 철해진 옛날 벽보들에서는 퍽퍽한 접착제와 두툴두툴한 돌벽의 흔적도 만져진다. 아카이브에는 “손가락의 기억”, 즉 촉지각 정보도 있다는 사실. 참고로, 불어 ‘digital’에는 ‘손가락’이라는 뜻과 ‘디지털 정보’라는 뜻이 함께 있다.
이처럼 역사가는 ‘평균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공허한지, 그리고 역사는 문해력뿐 아니라 오감을 동원해야“터득” 가능하다는 점을 불완전한 아카이브로부터 배운다. 아카이브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과 “보통 사람에 대한 이미지”의 간극을 가늠한다. 이 교훈을 소중히 여겨야, 주변인의 역사를 기존 역사의 ‘부록’으로 취급하지 않고, “버젓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 밖 존재들도 고려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 연구는 기존 지식체계에 등록되지 않은 소수자의 앎에 대한 연구다. ‘위안부’ 운동의 규범적 서사로부터 이탈한 이용수씨의 언어도 나름의 방식으로 축적한 정보와 교양의 산물일 테니 증언 연구의 긴요한 대상이다. 과연 ‘선/악,’ ‘진보/보수, ’‘애국/친일’, ‘운동/돈’, ‘노화와 비이성’ 같은 뭉툭하고 규범화된 잣대로 그 ‘이탈’의 맥락을 사려 깊게 짐작할 수 있을까?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시에 자기 시대라는 폭력에 훼손당하는 사람들과의 마주침”(<아카이브 취향>)이라고, 아를레트 파르주는 썼다. 여기서, “자기 시대”는 ‘위안부’를 경험한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운동 및 여성주의와 접촉해온 ‘2020년 현재’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