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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여자' 김희정 감독 - 여성 예술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담아
2020-06-11
글 : 김소미
사진 : 김한준 (객원 사진기자)

오랜 파리 유학 후 프랑스인 남편과 헤어지고 한국을 방문한 미라(김호정)는 젊음을 함께했던 영화감독 영은(김지영), 연극연출가 성우(김영민)를 만나 재회의 시간을 보낸다. 부유하는 대화가 자주 향하는 곳은 2년 전 생을 달리한 후배 배우 해란(류아벨)과의 기억. 불쑥 틈입하는 과거의 편린에 시달리는 미라 앞에 해란과 똑 닮은 젊은 배우까지 나타나면서 혼란은 가중된다. 파리에서 보냈던 사랑의 시간, 그리고 20년 전의 청춘을 유영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인 <프랑스여자>는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이하 <청포도 사탕>) <설행_눈길을 걷다>를 만든 김희정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다. 고요한 표피 아래서 벌어지는 정신의 동요를 담아내는 그의 영화는 이번에도 굴절된 기억의 창을 통해 예술가, 여성, 연인, 친구로서 살아온 누군가의 내면 풍경을 엿본다.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의 고독과 노스탤지어가 작품 전반의 정서를 이룬다. 우치 폴란드국립영화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생활도 한 감독 자신의 경험이 반영됐겠다.

=온전히 한곳에 정착한 것이 아닌 사람들, 이곳저곳에 걸쳐 살아가는 경계인들이 나를 포함해 내 주변에도 참 많다. 삶의 기준과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시대에 한곳을 오래 떠났다가 돌아오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한번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예감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공개 당시부터 김호정, 김지영, 류아벨 세 여성배우의 조합이 신선해서 주목받았는데.

=특히 중년 여성이 나오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늘 했다. 업계에서 좋은 여성배우들이 소모되는 면도 없지 않고. 현실이든 작품이든 주로 20~30대가 주인공을 차지하니까 나는 그보다 나이 많은 세대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 김호정 배우는 연극 활동할 때부터 무척 좋아했고 같이 해보고 싶었던 배우다. 김지영 배우는 홍지영 감독의 <결혼전야> 뒤풀이에서 처음 만나서 아침까지 같이 술을 먹으며 친해졌다. 류아벨 배우는 마스크도 좀 독특한 기운이 있고, 특유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느낌이 좋았다.

-예술가 집단, 특히 배우라는 예민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다분히 느껴지는 영화였다.

=배우들, 특히 여자배우들은 내면이 위태로워지기 쉽다. 남자배우들이 기득권을 쥐고, 매 순간 선택받아야 하고, 자기 재능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니까. 그래서 멀쩡하다가도 술만 먹으면 불안정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 인간형에 대한 나의 관찰, 그리고 애정이 분명히 들어 있다. 한편으론 미라처럼 본인이 창작을 하지는 않지만 예술가보다 훨씬 더 고고한 사람들에게도 끌렸다. 남들이 보면 까탈스럽다거나 피곤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인데 잘 들여다보면 그 안쪽에 한없이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미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기억력이 떨어지는데 동시에 기억에 집착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아픈 기억으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면서 동시에 눈은 떼지 못하는 형상이랄까.

=김호정 배우가 한번은 조금 답답한 듯 딱 그런 농담을 했었다. “감독님, 미라는 왜 이렇게 기억을 못해요? 이 정도면 치매 아니에요?” 하고. 실제로 우리는 기억의 많은 조각을 잃어버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 위주로 떠올린다. 내 영화 중 <청포도 사탕>도 그런 코드를 전면적으로 사용했다. 지워버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기억 같은 것들. <청포도 사탕>과 <프랑스여자>는 짝을 이루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기억에게 자신을 잡아달라고 먼저 손 내미는 사람들의 성향이 작품의 애틋한 감수성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좋아해줘>를 만든 박현진 감독이 <프랑스여자>를 보고 문자를 했는데, “현재를 살지만, 순간순간 과거 속에서도 사는 감각을 영화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충만한 시간이었다”고 적어주었다. 간명하게 요약해준 것 같다. 우리는 매일 순간을 살고 있고, 그 속에서 논리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경험을 한다. 그런 감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영화이기도 하고.

-감독도 회고와 사색을 즐기나.

=나는 낙천적이다. 술 먹고 지갑을 잃어버리면 ‘아~ 그래도 술값은 내고 잃어버렸으니 다행이지 뭐’ 하는 편이다. (웃음) 현재에 만족하려 하고. 요즘 하는 생각 중에는, 조선대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시나리오와 희곡을 가르치는 일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영화 만들기라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네편째 하고 있는 것도 놀랍다.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사는 보통의 삶을 살지 않아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 생활을 통해 얻게 되는 성숙함은 내게 없겠지만… 그런데 이런 성격인데도 어떤 죽음들은 절대 잊히지 않더라. 기억에 관한 한 작은 디테일을 굉장히 꼼꼼히 기억하는 면도 있다.

-이별과 동료의 죽음 등 미라는 상실을 겪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불쑥 틈입하는 기억의 운동은 결국 한 사람이 겪어나가는 애도 과정의 자연스러운 반응처럼 읽힌다. 세월호 텐트를 방문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도 의미심장했다.

=아마도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일 것이라는 감각….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마침 대학에서 ‘재난 시대에서 감수성 찾기’를 주제로 강의를 한다. 이 삶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할까, 기성세대의 책임은 무엇인가, 내게도 중요한 화두다.

-내러티브를 살펴보면 현재의 미라에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나는 소풍 당일보다 소풍을 가기 전날이, 다녀와서 소풍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설레는 사람인 것 같다. 정작 메인 이벤트는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것을 기다리거나 그것에 대한 반응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 좋아한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들이 그렇지 않나. 결혼 준비 장면은 있어도 결혼식은 나오지 않는 것처럼.(오즈 야스지로 영화 중 <만춘>.-편집자)

-미라가 누워 있는 모습, 잠들거나 깨어나는 모습을 자주 비춘다. 기억뿐만 아니라 꿈, 몽상 등 현실이 아닌 차원으로 적극적으로 빠져들고 싶기 때문일까.

=내가 평소에 누워 있는 걸 좋아해서. (웃음) <설행_눈길을 걷다> 때도 김태훈 배우가 누워 있는 장면이 많았다. 꿈이나 환상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표현이 아닐까 싶고,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서 한 관객이 내 영화를 마술적 리얼리즘과 결이 닿아 있다고 해준 평에도 그런 점에서 동의한다.

-몽환적인 색감과 조명의 조도, 실내 인테리어와 카메라 프레이밍 등 미장센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던데.

=전체 12회차 촬영 중 10회차를 한국에서 찍고, 2회차는 프랑스로 건너가 찍었다. 적은 회차에서도 세트 제작을 할 수 있었던 여건이 큰 역할을 했다. 함께하는 박정훈 촬영감독이 내가 실내 미장센을 특히 중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이번만큼은 꼭 세트를 짓자고 했고, 정말로 그게 가능해졌다. 미라가 한국에서 묵는 게스트하우스는 유정하 미술감독이 그레이 톤으로 중심을 잡고, 벽에 걸린 그림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배치했다. 박정범 감독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미리 보고는 잉마르 베리만 실내극의 영향을 짚어주었는데, 나도 인정한다. 내게도 정말 중요한 작가다.

-<열세살, 수아> 이후 지금까지 네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이번 영화가 가장 많은 개봉관을 얻었다고.

=맞다. 이 영화가 코로나19 시대를 어떻게 통과해나갈지 궁금하다. 그래도 잘되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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