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야구소녀' 꿈꾸는 인물의 진심어린 분투를 차분히 따라가는 영화
2020-06-16
글 : 남선우

야구부 창단 3년을 맞은 백송고에 경사가 난다. 졸업반 정호(곽동연) 가 프로 지명을 받은 것. 학교 복도에는 20년 만에 탄생한 여자 고교야구 투수 수인(이주영)의 기사가 담긴 액자가 내려가고 정호의 프로 입단 소식이 실린 기사가 걸린다. 얼떨떨한 표정의 정호 뒤로 프로 지명을 받기는커녕 계속 야구를 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수인이 학교를 빠져나온다. 수인이 향한 곳은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에게 프로팀 선발 테스트 기회를 주는 제도인 트라이아웃의 접수처. 수인은 반신반의하는 직원에게 당당히 자신이 야구선수라 말한다. 여자 야구선수가 생소한 이들은 수인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바라보지만 수인만은 자신에게 프로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딸이 운동을 포기하고 자신이 근무하는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원하는 엄마 해숙(염혜란), 딸을 응원하나 자기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생 아빠 귀남(송영규)은 수인이 꿈을 향해 가는 길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수인에게 야구를 취미로 해보라고 권하거나 핸드볼로의 전향을 제시하는 등 수인의 마음에 차지 않는 말만을 반복한다. 이때 신입 코치 진태(이준혁)만이 가족과 선생님을 무시하고 홀로 훈련을 이어가는 수인의 투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수인에게서 프로에 진출하지 못해 낙담했던 과거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진태는 수인에게 여자라는 조건이 아닌 부족한 실력 탓에 프로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라 일갈하며 고된 체력 단련을 시키고, 수인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할 무기인 너클볼을 익히도록 돕는다. 진태와의 훈련을 통해 ‘빠른 공이 아닌, 타자가 못 치는 공을 던지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긴 수인은 프로선수가 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32기 최윤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야구소녀>는 꿈꾸는 인물의 진심어린 분투를 차분히 따라간다. 영화 속에 펼쳐진 상황에 쉽게 흥분하거나 감동하지 않고 인물과 같이 호흡하는 연출이 미덥다. 영화는 자연스레 여자 프로야구 선수를 볼 수 없는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너머를 바라보는 수인이라는 인물 덕에 그 벽에 작은 돌을 던져 균열을 내려는 시도를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야구소녀>는 인물에게 마냥 밝은 미래를 그려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은 관객이 어떤 시선으로 수인을 바라봐왔는지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자못 안타깝게도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너클볼로 상징되는 나름의 돌파구를 제시함으로써 야구의 세계에서 소수인 이들이 어떠한 전략을 취할 수 있을지 넌지시 말을 건넨다. 다만 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방법이 없지는 않다고, 수인과 같은 소수자들이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너클볼을 던지고 있을 것이라고 관객에게 소리치는 것만 같다. 그러한 영화의 의도를 집약한 장면으로 트라이아웃에서 만난 수인과 제이미(원혜련)가 서로에게 응원을 보내는 신을 꼽을 수 있다. 참가자들부터 감독, 코치진까지 온통 남성인 야구장에서 단둘뿐인 여자 선수 수인과 제이미는 이날 처음 만났음에도 동질감과 동지애가 섞인 눈빛을 주고받는다. 영화 후반부에 불쑥 등장한 제이미는 수인에게 위협이나 경쟁의식을 심어주는 라이벌 여성이 아닌 미처 몰랐던 동반자이자 멀리 있었던 지지자가 된다. 그렇게 <야구소녀>는 야구장 안팎에 존재할 수많은 수인과 제이미들을 불러모아 이들이 쌓아갈 도전과 우정의 시간을 축복해주는 듯하다. 수인의 도약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경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밖에 자신이 수인보다 작았던 시절을 기억하며 수인이 잘되기를 비는 정호, 가수를 꿈꾸며 수인과 고민과 불안을 나누는 친구 방글(주해은)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따뜻한 생기로 채워진다. 영화가 끝나면, 타협하기보다 덤빌 줄 아는 수인과 그 친구들의 찬란함에 분명 박수를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CHECK POINT

연속 등판, 이주영!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단밤’의 주방장이자 MTF 트랜스젠더(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사람)인 마현이 역으로 사랑받은 이주영이 <야구소녀>에서는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선수에 도전하는 주수인 역으로 다시 한번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을 소화한다.

피터팬컴플렉스의 음악

음악을 맡은 데뷔 20년차 밴드 피터팬컴플렉스의 밝고 청량한 사운드가 <야구소녀>의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채운다. 수인이 고심 끝에 공을 던질 때마다 고조되는 음악이 특히 매력적.

진짜 야구소녀들

국내 첫 여자 야구선수 안향미 선수부터 2017 최연소 여자 야구 국가대표가 된 김라경 선수, 2019 대한민국 여성체육대상 꿈나무상을 수상한 박민서 선수까지. 영화는 ‘진짜 야구소녀들’ 의 지나온 역사와 앞으로의 미래를 응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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