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라이온 킹>이다. 그날 영화를 보기 전에 엄마는 매표소 직원에게 어떤 부탁을 했다. 늦게 와서 앞부분을 놓쳤으니, 다음 상영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그 부분만 보고 나오면 안되냐는 것이었다. 마음씨 좋은 그 직원은 흔쾌히 허락해줬고(그때는 이런 일이 은근 많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약속대로 앞부분만 본 뒤 나왔다. 고백하자면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스트리밍, 다운로드 서비스 덕분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가 상영시간에 맞춰야 했다. 조금이라도 텔레비전을 늦게 트는 바람에 만화영화 앞부분을 놓치면 그다음 날까지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그건 내가 놓친 부분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앞부분을 놓치는 바람에 그 회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분노’ 탓이 더 컸다. 그런데 엄마, 앞부분을 나중에 보라니요?
그래서인지 나는 <라이온 킹>을 꽤 감정적으로 기억한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엄청나게 큰 화면이 떠오르고,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어서 그저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불편한 의자에 몸을 밀어넣고 있던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기억이 조금 비틀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내 첫 번째 극장 경험은 <알라딘>이고, 극장에 늦었던 것도 그때였다고 했다. 이에 나는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었는데, 실제로 <알라딘>이 <라이온 킹>보다 먼저 개봉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논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라이온 킹>을 볼 때도 늦게 들어갔고, 그래서 기억이 헷갈렸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 내게 놀라운 사실은, <라이온 킹>과 달리 <알라딘>을 내가 꽤 편안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극장에서의 경험을 말이다. 정말? 전혀 집중하지 못했던 게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봤다고? 내가 정말 그랬다고?
영화 <프랑스여자>의 주인공 미라(김호정)도 비슷한 질문을 계속 한다.“내가? 정말 내가 그랬어?”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러니까 한때 배우와 연출가의 꿈을 꾸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들에게 말이다. 네명 중 한명은 사라졌고, 두명은 각각 연극연출가와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한명은 한국을 떠났다. 극중 미라는 기억의 부딪힘을 꽤 여러 번 맞이하는데, 가장 큰 계기는 남편과의 헤어짐이지만 질문을 거듭하게 만드는 건 그녀를 기억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들이 말하는 자신을 낯설게 여긴다. 그렇게 보인다. 멋있는 여자, 프랑스와 잘 어울리는 사람, 좋은 언니,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배우….
그녀는 자신을 향한 수사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래? 정말 그래? 그 질문은 행동의 진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수사에 숨어 있는 자신의 모습, 이미지, 그것을 둘러싼 어떤 풍경들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어색한 시선으로 친구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그녀 역시 친구들을 실제와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다. 정말? 그때 내가 그랬어? 그리고 네가 그랬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결국 이 질문들은 궤를 같이하고 있는 듯하다. 미라가 그 반문 혹은 질문을 통해 집요하게 쫓는 것은 자신의‘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했던 걸까.
어린 시절, 나는 타인에게 내 모습을 설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꽤 많은 시도를 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랐고, 그걸 위해서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도 믿었다. 사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좋은 사람, 지금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내가 게을러지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해준다. 동시에 이 욕망을 자각하는 것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변에서 원하는 것의 간극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단적으로 말해 아름답게 존재하고 싶다는 건, 요구와 생산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자의식을 유지하는 건 그 위험부담을 감지하며 정신을 붙드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질문하는 것. 미라처럼 계속 기억 속으로 되풀이해 들어가는 것. 정말? 내가 그랬어?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이 나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기를 늘 바라곤 한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과 그들의 기억, 혹은 그들의 욕망과 나의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럽고 치열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자주 패배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보려 애쓴다. 나는 혼란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미라 역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미라의 질문이 끌어내는 여정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프랑스여자>의 서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복잡해진다. 미라는 자신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 사이를 오가며 ‘진짜’를 찾으려 애쓴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고 상처이기도 하고 이별과 고독이기도 하며 우정과 배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표정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을 향한 어떤 얼굴. 그들을, 그러니까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 <프랑스여자>를 본 날은 비가 많이 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기억. 시사회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입장할 때 모두 체온을 쟀고, 서로 한열씩 비워두고 앉았으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스크를 착용했다. 미리 안내를 받은 사항이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경험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순식간에 어떤 이후의 시대로 훌쩍 넘어와버린 것 같았다. 내게 새로운 ‘최초’가 생긴 셈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이전 시대의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불만스럽고 불편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려 애쓰던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놓친 이야기를 계속 상상했다. 그래야 이해할 수 있으니까. 왜 어린 사자는 혼자 남았는지, 두려움과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지 계속 생각했다. 회피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때문에 <라이온 킹>은 내 최초의 극장 경험이 맞다. 이야기에 대한, 그리고 기억과 나 자신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