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슬로건은 ‘다시, 평화’이다. 김형석 프로그래머는‘다시, 평화’라는 슬로건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지었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새롭게 확장된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열린 공간에서 축제를 즐기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 상황에서 소소한 일상은 소중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조심스레 준비한 영화제 기간에 잠시나마 소중한 일상의 평화를 다시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처음이라 정신없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김형석·최은영 프로그래머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들을 신설하며 영화제 정체성 확립과 외연 확장에 힘을 주었다. 강원도 평창에서 몇년간 산 사람처럼 지역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던 두 프로그래머와 코로나19 시대의 영화제와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코로나19 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상황을 주시할 것 같다.
김형석 지금은 남북 문제보다 코로나19가 더 큰 문제다.
최은영 1회 때도 남북 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황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상황과 무관하게 준비된 영화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성근 영화제 이사장님도 얘기했듯 상황이 좋을 때든 안 좋을 때든 이런 영화제는 필요하다. 영화제 명칭을 평창남북평화영화제에서 평창국제평화영화제로 변경한 것도 영화제의 애초 취지가 세계 도처의 반평화적·반인권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롱런하는 영화제가 되었으면 한다.
-코로나19로 온라인 영화제를 결정한 곳도 많은데,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오프라인으로 열린다.
김형석 코로나19는 장기적으로 영화제뿐 아니라 지역행사의 성격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것이다. 우선 한국만의 독특한 영화제 문화가 있는데, 영화제에서의 영화 상영 대부분이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이루어진다. 일상의 영화적 경험을 집약하고 강화하는 방식의 영화제가 20년 넘게 이어졌고, 그것이 영화제 고유의 문화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 패러다임이 코로나19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다.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영화제를 오프라인에서 치르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코로나19 이후 영화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대안적 모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역을 철저히 하는 것은 기본이고, 멀티플렉스 중심의 영화제를 벗어나 평창의 지역적 특수성을 살리는 영화제로의 방향을 고민했다. 이번엔 대관령면 횡계리 곳곳의 문화공간을 대안 상영관으로 활용한다. 더불어 지역과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들을 마련했다. 이를테면 영화제 관객에게 강원도 지역 특산품을 살 수 있는 리워드를 제공한다거나, 굿즈 판매 수익을 강원도 독립영화에 기부한다거나, 영화제를 통해서 지역과 상생하는 모델을 만들어보려 한다. 코로나19가 준 교훈은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교훈을 영화제에도 적용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최은영 인구 밀도가 낮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게 이전에는 단점이었다면 지금은 장점이 되었다. 영화제를 다녀본 분들은 알겠지만, 낯선 곳에서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경험, 그 자체가 특별하지 않나. 그 경험을 영화제가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영화제는 장기적 대안이 될 순 없을 것이다.
-지난해 치른 1회 영화제를 평가한다면.
김형석 꼭 필요한 주제의 영화제였다는 확신이 들었고, 영화제를 많이 알리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올해는 공간도 축소하고 프로그램의 대중성도 확장했다. 6월 9일 티켓 예매가 시작됐는데, 이옥섭, 구교환 감독의 스페셜 토크 프로그램은 21초 만에 매진됐다. 올해 ‘클로즈업’ 섹션을 신설했고, 그 첫 번째로 이옥섭, 구교환 감독의 장·단편을 상영한다. 지난해엔 한국영화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올해는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의미 있는 감독전, 기획전을 마련했고, 그 일환으로 ‘클로즈업’과 ‘스펙트럼K’를 신설했다.
최은영 한국영화에 대한 안배를 비롯해 대중적인 야외 프로그램과 행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난해엔 영화제를 운영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느라 영화를 수급하고 트는 데 급급했다. 반면 올해는 <라라랜드>를 평창 바위공원에서 상영하거나 월정사에서 하림, 웅산, 바비킴이 공연하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상영하는 것처럼, 공간의 특수성과 영화의 성격까지 고려한 프로그래밍을 했다. 지난해에 영화제 끝나자마자 생각한 게 상영관으로 적절한 공간을 찾는 거였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떤 공간에서 무슨 영화를 틀 수 있을지.
-올해 영화제에서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뭐였나.
김형석 국제장편경쟁 섹션을 만들고 싶었고 올해 신설했다. 낯선 나라의 재미난 영화들, 새로운 이름들을 국제장편경쟁을 통해 소개하고 싶다. 언급했다시피 한국영화의 경향을 보여주는 스펙트럼K와 개성 있는 작가와 감독을 조명하는 클로즈업 섹션도 신설했다. 올해는 두 섹션 모두 여성감독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근 몇년간 여성감독들이 많이 등장해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젊은 여성감독들이 이렇게 연속적으로 등장해 의미있는 흐름을 만든 것은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일이다. 포스트 봉준호 세대 가 존재한다면 내가 볼 땐 윤가은, 김보라, 이옥섭과 같은 감독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첫 작품부터 뚜렷한 자기 세계를 보여줬다. 앞으로 이들이 한국영화의 미학을 이끌어갈 거라 생각한다. 신설 섹션을 통해 꾸준히 한국영화의 중요한 흐름을 짚어내려 한다.
최은영 피칭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통해서 아마추어나 지역민들에게 영화창작에 대한 기회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길도 열어두었다. 한쪽에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영화가 있다면 또 다른 한쪽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영화도 있다.
-국제장편경쟁 섹션을 신설한 것은 영화제의 외연을 확장하겠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국제영화제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최은영 우선 영화 선정 과정에서 프리미어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작품의 반 이상이 프리미어가 되었다. 이미 우리나라엔 국제영화제들이 꽤 있지만 영화의 누수가 있다고 느꼈다.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는 좋은 영화들이 있고, 소개할 영화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봤다. 올해 국제장편경쟁 섹션에 영화가 초청된 국가도 세네갈, 조지아, 멕시코 등 다양하다. 프리미어에 연연하지 않고 재밌는 영화를 열심히 찾아 소개하는 게 보람 있더라.
김형석 우리 영화제가 개봉의 징검다리가 됐으면 좋겠다. 1회 영화제 상영작 <백년의 기억>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고 이후 개봉까지 하게 된 것처럼, 그런 성과가 올해 더 많을 거라 예상한다. 지난해에 인상적이었던 관객 반응 중 하나가 ‘이렇게 재밌는 영화를 틀어놓고 왜 관객은 이만큼 못 모았냐’는 거였다. (웃음)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어떤 영화제로 인식되고 자리 잡았으면 좋겠나.
김형석 평화라는 테마도 중요하고 강원도라는 지역성도 중요한데, 무엇보다 6월에 한적한 곳에서 영화도 즐기고 휴양도 할 수 있는 영화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무주산골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는 사이가 좋다. (웃음) 경쟁이 아닌 보완 관계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대중친화적이되, 스펙트럼K나 클로즈업 섹션 등을 통해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까지 끌어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최은영 강원도 평창의 여름이 얼마나 괜찮은지, 6월의 평창이 얼마나 멋진지 느껴보셨으면 좋겠다. 지역과 결합된 영화제로서 지역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싶다. 또 하나는 평화라는 주제에 관한 건데, 이 주제가 품을 수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넓다. 아픔과 고통, 즐거움과 희망을 말하는 영화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