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이 화면 가득 차 있고, 소녀가 조심스레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소녀는 좁다란 무언가의 위를 걷고 있는지 양팔을 들어 균형을 잡는데, 흡사 여린 날개를 펼쳐드는 작은 새의 몸짓처럼도 보인다. 아이는 이내 무언가를 보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다시 프레임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간다. 그런데 아이는 어느 곳을 걷고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 오프닝부터, 맑고 강단 있어 보이는 이 작은 존재가 우리의 시선을 견인해가는 <나는보리>는 선한 품성을 지닌 영화다. 이야기는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보리(김아송)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영화엔 보리네 가족공동체를 뒤흔들 만큼 해악을 끼치는 인물도, 위협이 될 만한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구성했다는 김진유 감독은 애초부터 장애를 특별한 서사 장치로 이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장애를 영화적인 소재로 소비시켜선 안된다는 상식화된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나아가 농인과 청인, 수어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다른 정체성에 대해 보다 세심히 짚을 수 있는 길을 느긋하게 찾아 나서는데, 그 길 위엔 언제나 보리가 서 있다. 요컨대 <나는보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서 두리번거리는 영화가 아니라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 농인 부모를 둔 자녀)인 11살 소녀 보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농인과 청인의 다른 문화를 가로지르는 영화다.
그리고 그 끝엔 올바른 메시지가 자리한다. 그 메시지의 요체를 드러내는 말은 아빠(곽진석)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라는 것이다. 이 공공성이 짙은 메시지를 날숨을 뱉어내듯 편안하게 꺼내놓는 <나는보리>는 분명 우리 사회에 필요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를 부드러운 어조와 사회적 긴요함에서 찾았냐면 그건 아니다. 알다시피 필요가 늘 매혹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교훈을 전하는 게 영화의 중요한 자질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너무나 착하고 온화한 방식으로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는 지루해지기 쉽다. 나는 <나는보리>가 이 한계들을 모두 뛰어넘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나의 감각과 인식을 자극한 어떤 지점들에 대해선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다. 그 지점들이 나의 무딘 인식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둔한 관객 한명을 움직이고 일깨운 것도 이 영화의 성취일 것이기 때문이다.
11살 생애 중 가장 큰 인생의 진폭을 지금 겪고 있는 듯한 보리의 소원은 “소리를 잃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가족 중 저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보리가 느끼는 소외감을 지켜본 관객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망이 얼마간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표현 때문이다. 무언가를 가져야만 잃는 법인데 가질 수 없는 소리를 잃고 싶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 싶었다. 한편으론 소리와 언어를 보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보리의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된 표현이라고 쓸데없이 머리를 굴려보기도 하고, 소리가 안 들리게 해달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일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리의 표현처럼 현재 보리의 바람을 명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말은 사실 없다. 소리를 잃고 싶다는 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안 들리게 해달라는 소망과 목소리를 잃게 해달라는 소망이 합쳐진 표현으로, 뜻 그대로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수화를 할 수 있는 청인이 아니라 가족들과 같은 정체성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보리가 하기 시작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나는 보리의 감정을 절감한다 여겼지만 실은 보리의 소원을 청각을 잃게 해달라는 말로만 받아들이며 그것이 보리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아주 명확한 표현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둔한 인식을 일깨운 요소가 있는데, 그건 <나는보리>의 자막이다. 알다시피 이 영화에선 수어와 음성언어로 이뤄지는 모든 대화를 자막으로 옮기고 있다. 내게 이 자막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영화가 청인과 농인을 위한 자막을 평등하게 제공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흥미로워한 부분일 텐데, 영화에선 수어로 이뤄지는 대화들을 보이는 그대로 단어별로 배열하고 있다. 수어를 문자언어로 바꿀 때 음성언어의 문법에 따라 옮기는 게 통상적인 방식이라면 이 영화에선 보이는 언어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수어가 음성언어와 다른 문법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는데, 이를테면 수어와 음성언어의 어순이 사뭇 다르다는 점과 조사가 음성언어처럼 많지 않거나 생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막들은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다’라는 메시지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음성언어에 맞추지 않고 보이는 언어를 보이는 그대로 옮기는 행위가 이 메시지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평등과 공존의 메시지를 체감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보리>엔 체감의 여지를 반감시키는 지점들 또한 포진해 있다. 이 영화는 착해도 너무 착하다. 물론 착한 건 흠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착하고 어떤 방식으로 온화해지느냐에 달려 있다. 보통 착한 영화가 비판받는 지점은 현실의 무게를 외면한 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척하며 온화하고 행복하게 보이기만 하는 환상을 불어넣을 때이다. 반면 비판할 성질의 것은 아니나 착한 영화는 지루해지기도 쉬운데, 선하기만 한 인물들의 선한 성정만이 인물의 캐릭터로 그려질 때다. <나는보리>의 인물들은 후자의 상황에 처한다. 보리네 가족구성원은 한결같이 선하고 천진하다. 물론 세상에 그런 가족이 없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런 가족이 영화의 인물로 그려질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온화한 부모님과 착하고 밝은 아이들이란 전형적인 캐릭터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캐릭터들은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또한 김진유는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좀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그의 의도는 보리네 가족을 묘사하는 데 있어 반은 적중하고, 나머지 반은 조금 엇나간 것 같다. 그는 농인 가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탁월한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감독 자신이 살았던 모습을 반영한 보리네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균형감각을 잃은 것 같다.
보리네 가족은 어느 면에선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그들이 농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범해 보일 정도로 화목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가족이 화목했기에 이러한 가족이 탄생했다고 봐도 그만이겠지만, 그러기엔 이 가족들의 일상에서 노스탤지어가 너무 물씬 풍겨난다. 마치 우리의 기억에서 가족의 가장 즐겁고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만을 선별해 삽입한 것처럼 말이다. 가령 실을 감아 이를 뽑고, 개교기념일인 줄 모르고 등교를 하고, 자장면을 시켜 먹는 그런 웃기고 아름다운 추억들. 그래서 결국 맑고 강단 있는 보리가 어느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지점들 때문에 <나는보리>는 아주 투명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상투적이고 편편한 영화가 되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