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겐 각자의 천국이 있다. 천국이 진정 행복을 주는 곳이라면 제각기 믿는 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는 게 당연하다. 천국의 모습을 묘사한 여러 상상 중에 특히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그곳에선 먼저 세상을 먼저 떠난 반려동물이, 그중에서도 특히 개가 천국의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개를 한번이라도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해한다. 이건 조건 없는 애정과 사랑을 준 존재에 대한 뒤늦은 고백이다. 늘 문 앞에서 인간이 돌아오길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모습 그대로 천국에서도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을 산다는 이유로 우리 곁을 먼저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반쪽.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볼 때마다 한 가지 질문이 피어난다. 개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걸까. 우리는 감히 이 믿음직한 존재의 과분한 애정을 이렇게 무한정 받아도 좋은 걸까. 안카 다미안 감독의 <환상의 마로나>는 당신의 오랜 물음표에 마침표를 찍을 사려 깊은 이야기다.
애니메이션에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어느 날 도로 위에서 개 한 마리가 로드킬로 사망했다. 과거도 미래도, 어쩌면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사소한 사건. 도로 위에 얼룩처럼 새겨진 강아지의 흔적은 백묵이 지워지듯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의 우주, 마로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영점의 영점. <환상의 마로나>는 로드킬을 당한 개 마로나가 본인의 기억을 더듬어 직접 들려주는 생의 기록이다. 우리는 마로나라 불렸던 개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하나의 생명이 기억으로 완성되어가는 이야기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영화관과 함께 영화는 마로나의 삶을, 온전히 마로나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여기 한 마리 강아지가 태어났다.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강아지는 ‘아홉’이라고 불린다. 도고 아르헨티노종인 아빠는 귀족 혈통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찬 차별주의자다. 반면 엄마는 사랑과 뼈다귀 앞에서 어떤 종이든 평등하다고 믿는 진정한 숙녀였다. 인간의 기준으론 비록 잡종이었지만 종을 차별하던 아빠조차 빠진, 종의 구별 따위를 무력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개였다. 아홉이었던 시절 마로나는 기억한다. 행복은 숫자 9 모양 같고 우유 맛이 난다고. 모든 걱정을 씻어주는 따뜻하고 축축한 엄마의 혀에 감싸여 완벽하고 충만했던 시절이 지나고, 마로나는 형제들을 떠나 새로운 주인에게 맡겨진다. 처음엔 아빠의 집에 잠시 머물렀던 아홉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거리로 내쫓긴다.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은 단 12분. 그렇게 마로나에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환상의 마로나>는 ‘아홉’이 ‘마로나’가 되기까지, 세명의 인간과 만나며 겪은 시간들을 담아낸다. 곡예사 마놀에게 아홉은 ‘아나’였고, 건설업자 이스트반에게 아홉은 ‘사라’였으며, 조숙한 소녀 솔랑주에게 아홉은 ‘마로나’였다. 마로나는 종에 얽매이지 않았던 엄마처럼 단지 사랑스런 한 마리의 개였으며 동시에 이 모든 이름이기도 했다. 오직 자기 자신일 것. <환상의 마로나>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개를 사랑하는 만큼 개를 소재로 한 영화나 이야기는 넘쳐난다. 하지만 대부분 인간의 시점에서 해석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뿐 온전히 개의 관점에서 상상하고 그려진 영화는 극히 드물다. 일단 우리는 개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 알 수 없기에 의인화라는 우회로를 쉽게 택하곤 한다. 그 순간 이야기는 개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어버린다. 개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천사라는 낡고 불편한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이다.
<환상의 마로나>는 다르다. 충만한 감정과 반짝반짝 빛나는 묘사로 가득한 이 애니메이션은 개의 일생을 온전히 개의 것으로 되돌려주고자 노력한다. 이 반짝이는 상상은 지극한 공감과 세밀한 감각으로부터 시작되는 마법과도 같다. 비결은 두 가지다. 첫번째는 인물의 내면이 반영된 다채로운 작화, 두 번째는 관계와 공감의 힘이다. 인간인 우리는 개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때문에 안카 다미안 감독은 반려견과 인간 사이의 교감, 바로 그 관계성에 주목한다.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크룰릭: 나의 저승길 이야기>에서부터 안카 다미안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데 탁월한 성취를 선보였다. 신작 <환상의 마로나>에서도 이런 재능은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서로가 서로의 의미가 되는 시간들을 각기 다른 이름을 매개로 인생의 세 가지 시기에 빗대어 묘사하는 것이다. 마로나는 온전히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동시에 엄마와 함께할 땐 아홉이었고, 마놀에겐 아나였으며, 이스트반에겐 사라였다. 마로나의 이름은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인 셈이다.
여기에 마로나가 보고 느끼고 감각한 것들은 유럽 그래픽노블을 대표하는 벨기에의 일러스트레이터 브레흐트 에번스의 손끝을 거쳐 매번 다름 작화로 피어난다. 아홉이었을 때의 마로나, 마놀과 함께했던 시절의 행복, 거리를 떠돌다 이스트반과 만났을 때의 경험 등은 각기 다른 작화로 묘사된다. 마로나와 함께하는 세명의 인물들은 각각의 시절을 상징하고 있다. 충만한 유년 시절이었던 마놀과의 시간은 자유분방한 곡선과 환상적인 장면들로 구현된다. <어린 왕자>(1974)에서 밥 포시가 연기한 뱀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곡선의 운동은 애니메이션만이 구현할 수 있는 질감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스트반의 공간은 건설업자답게 단단하고 물질적이다. 직선과 딱딱함으로 표현된 이 시기는 규칙과 엄격함으로 제약받는 청소년기의 결핍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에서 마침내 삶의 균형을 찾아낸 마로나로서의 시간, 그러니까 사춘기 소녀 솔랑주와 함께한 시기가 자리한다. <환상의 마로나>의 작화는 이러한 감정과 감각을 곧장 시각으로 표현한다. 오직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반짝거리는 상상력과 직관적인 표현의 놀라운 결합. 감히 애니메이션이란 언어가 구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다.
행복은 작은 것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의 견생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되짚는, 정교한 우화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미래를 살거나 과거에 붙잡힌 채 종종 발밑에 핀 꽃의 아름다움을 놓치곤 한다. 행복은 방향이나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지금의 상태를 설명하는 감정이다. 충만하게 차올라 그것만으로도 온 우주가 채워지는 시간. 인간은 행복 한가운데 있을 때조차 지금의 행복이 눈 녹듯 사라질까 걱정하지만 개들은 오직 눈앞의 시간에 집중하는 법을 알고 있다. 만약 행복이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 곁에 있는 개의 모습을 하고있지 않을까. 그렇게 안카 다미안 감독은 인간이 바라는 개의 모습을 상상하는 대신 개들의 솔직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다시, 묻자면 개들은 왜 그토록 인간에게 헌신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가. 답은 어렵지 않다. 당신이야말로 당신 개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부디 반대의 경우도 그렇기를 희망하며 마로나가 알려준 행복의 비밀을 전한다. “행복은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우유 한 접시, 실컷 축인 혀/ 낮잠. 뼈다귀 묻을 곳/ 손, 미소, 목소리, 마음/ 뛰어올라, 뛰어올라/ 최대한 높이/ 영원히 행복한 곳으로.”
추신 사실 <환상의 마로나>가 전하는 행복의 의미를 설명하는 덴 이 노래 한곡 이면 족하다. 동시에 아무리 많은 단어를 동원해도 비범한 애니메이션이 안기는 충만함을 설명하긴 부족하다. 오랜만에 만점을 매겼다. 별점 다섯개는 평가가 아니라 고백이다. 못다한 나의 고백은 1262호 프런트 라인에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