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작 <인간수업>에서 결국 아이들을 돕지 못하는 경사 해경을 두고 배우 김여진은 “어른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 인물”이라 설명한다. 칸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헤븐: 행복의 나라로>(가제)에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여성 경찰서장”을 연기하며 전형적인 남성 서사를 비트는 쾌감을 선사한다. 지금껏 외면해온 현실,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얼굴을 우리 앞에 가져다놓는 배우. 지금, 김여진의 행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가 차기작으로 선택한 연극 <마우스피스>는 현실적인 문제로 예술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인물 데클란과 그의 삶을 연극으로 옮기는 중년 작가 리비의 이야기를 그린다. 계급과 나이, 성별까지 다른 두 인물의 관계와 갈등이 도드라지고, 예술과 사랑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들이 작품의 면면을 다채롭게 엮는다. 우연히 본 연극을 통해 배우의 길로 들어선 김여진은 지금, 다시 자신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쌓아온 모든 것을 끌어내고, 그 이상의 것을 얹어 표현”해내려 한다.
-<리차드 3세> 이후 <마우스피스>로 2년 만에 연극무대에 돌아왔다.
=<리차드 3세>를 할 때 최소 2, 3년에 한번은 연극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연극을 하며 받는 에너지가 정말 커서 연극을 통해 충전하고 그 힘으로 또 새롭게 도전하며 오래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촬영 중에 <마우스피스> 대본을 읽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놓지를 못하겠더라. 단숨에 대본을 다 읽고 바로 전화했다. “회사가 뭐라고 할진 모르겠는데 일단 저는 하겠습니다.” (일동 웃음)
-작품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렇다. 너무 흥미진진해서 한번쯤 인생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우스피스>는 아주 이질적인, 평생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만나며 일어나는 이야기다.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기본적으로 두 주인공이 세대와 계급, 성별까지 전부 다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을 다룬다. 관객도 어디에 방점을 찍고 보느냐에 따라 극이 다르게 읽힐 거다. 사랑 이야기라면 사랑 이야기고, 직업윤리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도 맞다. 다 들어가 있다. 다양한 주제와 갈등을 다루다보니 연기하는 사람도 굉장히 여러 층위를 갖고 연기에 임해야 한다. 2인극이라 대사도 많고 1시간 40여분 동안 내게 주어진 퇴장 시간은 1분 정도. 어려운 도전이긴 하다.
-방금 이야기한 바만 놓고 봐도 연기하기가 녹록지 않을 것 같다. 극중 연기하는 리비는, 예술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데클란의 삶을 연극으로 옮기는 중년의 작가다. 그런 리비를 어떤 인물로 이해하고 표현하려 했나.
=사실 아직 리비를 완성하진 못했다. 대본을 받은 날부터 하루에 한번씩 읽고 있는데 정말 그날그날 매일 다르게 읽힌다. 어느 날은 백퍼센트 리비 편이 됐다가, 어느 날은 완벽하게 리비의 반대편에 선다. 리비는 작가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대상화해서 본다. 모든 작가가 그럴 거고 심지어 연기자인 나도 그렇다. 어떤 사람을 보고 ‘저건 나중에 연기에 써야지’ 하고 담아뒀다가 후에 적절히 편집해 쓸 때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떻고, 그 삶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져야 하는가에 관한 건 다른 문제 같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다. 마지막에 이 극이 어떻게 완성될지 나도 궁금하다. 네 사람이 매일 부딪치며 치열하게 찾고 있다.
-팬들 사이에선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은 반드시 봐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배우들도 처음과 마지막 공연은 좀 남다른 각오로 임하지 않을까 싶은데.
=첫 공연은 마지막처럼, 마지막 공연은 처음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첫날의 완성도가 가장 높으면 좋겠다. 첫날 첫 공연 때만큼의 긴장감과 신선함을 유지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처음부터 완성체로 가고 싶다. 끝으로 갈수록 결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디테일이 생기고 두 사람간의 합이 잘 맞아가고 하는 변화는 생기겠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원칙과 해석을 가져가려 한다.
-“드라마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연극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배우 김여진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연극의 힘이란.
=우선 방송은 엔지도 있고 대본 수정도 있고 기다리는 시간도 길다. 그래서 완벽히 준비한다기보다는 우선 대본을 까먹지 않을 만큼만 외우고 촬영장에 간다. 생각을 비우고 가서 현장에서 감독님, 상대 배우와 어떻게 할지 상의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촬영에 들어가면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걸 툭 하고 내놓되 그 순간 딱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고 끝낸다. 다만 그 결과물이 오래 남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연출, 촬영, 조명, 음향팀 전부 모여 다같이 하나의 프레임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대중이 보는 건 우리 모두가 만든 최선의 결과물이다. 반면 연극은 정말 라이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숨길 수 없고 관객도 그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칠 수 없다. 엔지도 없고 다시 할 수도 없다. 올라간 그날의 공연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정말 무서운 거다. 그것을 위한 준비과정이 엄청나게 치열하다. 내가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쌓아온 걸 다 쏟아붓고도 그 이상을 해야 한다. 무대 위에서 누가 날 도와주겠나. 오롯이 내가 전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연극은 내가 연습을 어떻게 했고, 얼마나 많은 걸 갖고 고민했는지 다 드러난다.
-극을 올리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겠다.
=그렇다. 잠도 잘 못 자고, 못 먹고, 거의 매초 계속 극에 관한 생각만 하는 상태가 된다. 연습과 공연 모두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여행이나 모험을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무게로 내 삶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최근 출연작인 드라마 <인간수업>에 관해서도 묻고싶다. 상반된 평가가 오가는 작품인데 이에 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없더라.
=내가 덧붙일 이야기가 있나 싶다. 그래도 말해보자면 대본부터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내가 벌써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으니 얼마나 많은 대본을 봤겠나. 그런데도 정말 낯설고 충격적이고. 그런데 재밌었다. 다음 화 없는지 바로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웃음) 이 소재를 택하고 치열하게 조사하고 사실적으로 쓰려고 노력한 점, 한계를 짓지 않고 밀어붙인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연기한 여성 청소년계 경사인 해경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좋은 의도에 비해 아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인물이다.
=혼자라서 그렇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눈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해경 혼자서 뭘 하기가 어렵다. 해경은 그런 상황에서 어른들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본 어른들은 전부 한 걸음 물러나서 요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지내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세심하게 지켜보는 시선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살아남은 아이>에서도 미숙의 시선과 태도가 영화의 몰입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게 봐주면 감사하다. 정말 아끼는 작품이다. <살아남은 아이>는 아이를 잃은 엄마란 설정이라서 아이의 주변을 잘 구성하려 했다. 예를 들면 화가 나면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아이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취미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 특히 미운 점들을 많이 만들어놓는다. 좋은 추억만 생각하는 것보다 미운 정이 든 사람이 사라졌을 때 슬픔은 배가된다. 그런 배경을 꼼꼼하게 형성해놓으면 깊은 슬픔은 의외로 빨리 생겨난다.
-축하할 일도 있었다. 출연한 <헤븐: 행복의 나라로>가 칸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다만 올해 칸국제영화제가 열리지 않아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무사히 열렸어도 남아서 연극 연습한다고 했을 것 같다. (웃음) 나는 최민식과 박해일 배우 두 사람을 쫓는 경찰서장을 맡았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경찰서장을 만나게 될 거다. (웃음) 대개 60대를 앞둔 꼰대 남자 서장인데 거기에 여자인 나를 앉힐 줄 누가 알았을까. 비주얼적으로도 굉장히 파격적이다. 나는 나시 입고 가운데에 서 있고 뒤로는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형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굉장히 마초적이고 전형적인 남자 서사를 가진 인물인데, 이걸 여자가 하니 확 비틀어지며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더라. 이런 역할을 처음 해봐서 쾌감이 느껴졌다.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 때 이후로 임상수 감독님을 정말 오랜만에 뵀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촬영했는데 칸에 초대받았다니 굉장히 자랑스럽고 의외의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최민식 배우와도 <취화선> 이후 두 번째로 합을 맞춘 작품인데, 두번 다 칸에 가서 다음에도 또 같이하기로 했다. (웃음)
-확실히 최근 들어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도 큰 물결이 될 거라 본다. 우리 모두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웃음) 남성 중심의 서사는 재미를 떠나서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여자 후배들에게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올 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다.
-혹시 본인에게 왔으면 하는 기회가 있나. 최근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사이클이 본인 성향에 잘 맞아서 더 많은 영화, 더 다양한 장르에서 여러 역할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질문도 사실 여자배우들에게 많이 간다. 들어오는 역할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뭐든지 해보고 싶다. 여자 형사 캐릭터도 이제야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우주인, 박사, 깡패, 천재 물리학자, 이런 것도 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사람이 아닌 것도 해보고 싶다. 고릴라 같은 역할이랄지.(웃음) 연기 욕심이 진짜 많은 것 같다.
-연기 외에 또 욕심을 내는 영역이 있나. 찾아본 바로는 분야를 막론하고 다독가인 듯한데.
=맞다. 매체보다는 텍스트를 좋아한다. 최근 들어선 SF소설을 많이 읽는다. 현재 아작 출판사에서 제작하는 SF 오디오북에 계속 참여하고 있어서 다양한 시대, 여러 주제의 SF소설들을 접하고 있다. 목소리 연기를 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가령 1인5역을 할 때도 있었는데 즉흥적으로 목소리와 말투를 바꿔가며 연기하는 거다. 녹음실 밖에서 듣고 다 웃는다. (웃음) 그런 경험이 정말 즐겁다. SF소설은 시선을 미래에서 현재로 향하는 힘을 갖게 한다. 미래에서 현재를 보면 얼마나 미개하고 잔혹해 보일지 가늠해본다. 그 밖에도 최근에 정세랑 작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정말 즐겁게 읽었다. 이 자리를 빌려 정세랑 작가님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웃음)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비상임위원에 임명됐다. 어떤 목표를 갖고 임했는지 궁금하다.
=중소영화를 지원하고 싶었다. 우리나라 영화시장은 천만영화로 이끌어갈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플랫폼도 다양해졌으니 전세계 관객을 대상으로,‘이런 영화도 누군가가 볼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다양화되어야지 일부 영화의 독과점으론 안된다. 다양한 주제를 건드리는 중소영화들을 지원하려는 목표를 갖고 영진위에 들어왔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사태에 발맞추기 바쁘다. 들어와서 보니 돈을 집행하는 입장, 또 그 돈이 필요한 양측의 입장이 전부 이해가 간다. 영화계 현장에서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당장은 극장들이 너무 힘드니까 잘 버틸 수 있도록 힘이 돼주려 노력한다.
-그간의 행보를 보면 단순히 ‘배우 김여진’의 모습에 매몰되지 않는, 일과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일과 삶의 균형을 잡는 걸 내가 워낙 중요시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들이 빛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봤다.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기 쉽다. 빛이 너무 강하니까 그림자도 크고 강하게 져서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도 30대 초반까지는 힘들었다. 감정을 많이 쓰는 직업이라 일이 끝난 후의 공허함이 정말 컸다. 나의 일상이란 건 아무것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행도 다녀봤지만 그때뿐이었다. 이 일 말고 내 삶이라는 게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현재는 엄마로서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배역은 나 아니어도 다른 배우들이 맡을 수 있지만, 내 아이의 엄마는 나 아니면 못하지 않나. 일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엄마가 되어야 할 땐 확실하게 모드를 바꾼다. 가족이, 아이가, 나를 붙들어주는 닻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김여진의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작품에 깊이 몰입해 있는 시간. 나도 나지만 나와 함께하는 이들이 많이 보일 거다. 세 배우들과 연출, 조연출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너무 뛰어나다. 내가 20년 넘게 이 일을 해왔는데 왜 저런걸 못하지 싶고 부딪쳐가며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정말 새롭다. 많이 배운다. 전부 내가 잘 거두어서 앞으로 잘 써먹을 거다. (웃음) 참고로 내가 늘 이랬던 건 아니다. 정말 좋아서 좋다고 말하는 거다. 내가 오기 전에도 미리 말해놨다. 인터뷰할 때 진짜 다 천재들이라고 말할 거라고. (일동 웃음) 연극에 푹 빠져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