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분장으로 민낯을 감춘 사람들이 이태원을 물들이는 핼러윈데이. 우연한 사고와 괴로운 인연으로 엮인 J(임화영), 희태(박종환), 강태(남연우), 쎈(이승원), 백구(박세준)가 영업이 끝난 바에 모인다. 이들이 꾸는 하룻밤 악몽을 기록한 <팡파레>는 원치 않게 성폭행에 가담한 가해자와 그 피해자의 재회를 그린 <가시꽃>, 치매 노인의 실수로 파국을 맞은 가족을 들여다본 <현기증>으로 우리 내면에 숨어든 불안과 공포를 건드린 이돈구 감독의 신작이다. 그는 이번에도 분노를 숨긴 인물들을 깨워 어두운 게임에 초대했다. 만화적 캐릭터, 강렬한 조명, 넘치는 핏물로 들끓는 <팡파레>는 어쩌면 이돈구 감독이 만든 가장 장르적인 작품일 테다. 그러나 이돈구 감독은 “<가시꽃> <현기증> <팡파레> 다 장르영화라고 본다”며 감독 개인이 지닌 감각이 사회적 맥락과 만나 영화로 탄생하는 순간에 대해 다시 이야기했다.
-<현기증> 이후 차기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팡파레>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제작사 세 군데를 옮겨다니며 상업영화를 준비하다 결국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려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대인기피증 같은 게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혼낼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이런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영화밖에 없어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약자고 을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으로 참아야 했던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회적으로도 갑을 문제가 대두되던 시점이었고, 그 관계가 전복되는 순간의 쾌감이 재밌을 것 같아 <팡파레>를 구상했다. 영화를 만들면서는 오히려 나도 언젠가 갑의 위치에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겠다는 경각심이 생기더라.
-상처에서 출발한 작품이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큰 보너스를 받는 느낌이었다. (웃음) 몇년 동안 마음고생을 했으니 선물 받아가라고. 영화를 찍는 동안에도 감사한 일이 많았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걱정할 만큼 열악한 현장이었는데, 매일같이 간식을 들고 찾아온 손님들 덕에 모든 스탭과 배우들이 살찔 수 있었다.
-영화제에서의 관객 반응은 어땠나.
=호불호가 정확히 나뉘더라. 저예산으로 장르물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를 좋게 봐준 분들도 있고, 직접적인 표현을 불편하게 느낀 분들도 있었다.
-전작과 다른 지점을 느낀 관객도 많았을 테다. 이야기의 착상부터 말해보자면, <가시꽃>의 경우 뉴스에서 성폭행 사건을 보고, <현기증>은 책과 인터뷰를 통해 접한 사실들에서 착안해 치매를 겪는 인물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에 반해 <팡파레>는 감독 본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장르영화라는 점에서 전작들과 결을 달리하는 것 같다.
=사실 세 작품 다 나로부터 시작한 영화인데, 당시 내가 강렬하게 느끼고 있던 이슈들을 접목시킨 셈이다. <가시꽃>의 성공(남연우)은 꼭 나 같다. 물론 내가 영화에 나오는 범죄들을 저질렀다는 건 아니다.(웃음) 성공의 성격,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를 나로부터 따온 것이다. <현기증>도 우리 가족을 보면서 느낀 혼란을 풀어낸 영화다.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매형이 생기고 조카가 생겼는데, 새로운 가족구성원들을 보며 괜히 불편한 감정이 생기더라. 좋은 사람들이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어머니가 손자를 안고 있는 이미지가 너무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만든 영화가 <현기증>이다. 그래서인지 세 작품을 만들 때 내 마음가짐은 모두 동일했다. 개인적으로는 셋 다 장르영화라고 본다. 드라마로 시작해 인물들이 폭발하면서 장르가 바뀐다고 생각한다.
-<가시꽃>과 <현기증>에서는 인물들이 끔찍한 사건의 여파 속에서 신음하던 것과 달리 <팡파레>에서는 인물들이 악몽 같은 사건 그 자체를 통과한다는 점에서 더 장르적으로 느껴졌다.
=환기될 수 있는 지점이 전혀 없는 이야기라서 관객이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고 집중력 있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다. 반전을 예상하더라도 궁금증을 갖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내러티브 안의 레이어들을 섬세하게 다루고자 했다.
-<팡파레>의 다섯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었나.
=희태와 강태는 마약 운반을 하는 좀도둑, 쎈은 전국구 조폭, 백구는 시체 처리사, J는 킬러라고 설정했다. J는 인물이 아닌 현상을 그린 캐릭터기 때문에 초고에는 J가 킬러라는 언급이 없었는데, 마지막 통화 신의 대사를 통해 직업을 유추할 수 있게 했다. 그전까지는 각자의 선입견에 따라 볼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했다. 모두 너무나 장르적인 컨셉 안에서 픽션화된 인물들이기 때문에 배우들이 개연성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직업만 그런 사람들이니 너무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기를 원했다.
-무시무시한 인물들이다. 사전조사를 했나.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나는 연구 조사를 지독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현기증> 때는 공주보호감호소에 가서 식사 중인 의사선생님을 설득해 같이 환자를 만나러 들어갈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 했다. 그분들은 음지에 계셔서 뵙기도 어렵다. 수소문해도 방법이 없다. (웃음) 내가 느낀 감정으로부터 만든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해결해보고자 했다.
-유일한 여성 인물이자 후반부를 장악하는 J에 대해 더 얘기해보자. J를 인물이 아닌 현상으로 그리고 싶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강자와 약자, 갑과 을 같은 권력관계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형성되는 분위기를 예민하게 체감하던 당시였다. 그런 막연한 현상을 배우가 장르적인 컨셉 안에서 표현해준다면 어떨까 싶었다. 장르적인 컨셉이 없으면 감독만 알 수 있는 실험영화가 되니까.
-J를 보며 <가시꽃>의 장미(양조아)도 떠올랐다. 장미와 달리 J는 복수 혹은 반격을 위한 남성 대리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여성이다. 이러한 캐릭터의 등장도 일종의 ‘현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J가 약자로 보여야 하니 여자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말로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고 하지만 일상적으로 우리가 여성에게 들이대는 잣대와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또는 과감하게 J를 여성으로 만든 것 같다. 시시때때로 드러나는 인간의 얄팍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원한 강자, 영원한 갑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J를 통해 그런 의도를 표현하고 싶었다.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텐데.
=운 좋게도 처음부터 원했던 바를 빌릴 수 있었다. 사장님이 기자 출신이라 영화 담당 기자들에게 나에 대해 물었는데 믿고 빌려줘도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더라. (웃음) 그렇게 해서 사장님은 열흘간 휴가를 가셨고, 우리는 총 9회차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세팅을 다 해놓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방마다 컨셉을 잡겠다는 생각으로 기존 조명을 다 빼고 새 조명을 설치했다.
-음악의 비중도 크다. <현기증>에서 함께한 김철환 음악감독, 남연우 감독과 작업해온 오도이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음악에 집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주얼적으로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없으니 음악으로 매끄럽게 이어가보고 싶었다. 김철환 음악감독에게 상황에 따라 튀어나오는 음악을, 오도이 음악감독에게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는 음악을 맡겼다.
-다음으로는 어떤 작품을 준비 중인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두편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상업적인 장르물, 또 하나는 극사실주의적인 이야기다.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