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과 영화진흥위원회가 독립예술영화를 더 많은 관객에게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온라인 유통지원사업, 히든픽처스의 7월 선정작을 소개한다. 이름 그대로 영화가 지닌 저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을 엄선한 히든픽처스는 극장 바깥에서도 숨은 명작을 접할 수 있는 유용한 기회다. 극장 나들이가 전처럼 마냥 쉽지만은 않은 요즘, 히든픽처스의 큐레이션은 좋은 영화를 향한 관객의 갈증을 해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번 7월의 히든픽처스는 한국 근현대사를 조명한 다큐멘터리와 아스라한 청춘의 성장담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개성 있는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지닌 10편의 영화들(장편 4편, 단편 6편)로 꾸려졌다.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KT 올레 tv에서 온라인 상영을 진행한 것과 달리 7~8월은 LG U+tv 히든픽처스 특집관을 통해 공개된다. U+모바일tv를 통해서도 볼 수 있으니 영화와 함께하는 피서를 계획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히든픽처스 특집관을 찾길 바란다.
기쁜 우리 젊은 날
[장편] <판소리 복서>
감독 정혁기 출연 엄태구, 이혜리, 김희원 제작연도 2018년
세계 최초 판소리 복싱. 뇌세포 손상으로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판소리 복서>의 주인공 병구(엄태구)는 이 요상한 조합을 꿈꾼다. 정혁기 감독에게 뜻밖의 유명세를 안긴 단편영화 <뎀프시롤: 참회록>(2014)을 장편화한 <판소리 복서>는 단편에서 번쩍인 아이디어가 호흡이 긴 장편영화에서도 여전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다. 체육관을 운영하는 박 관장(김희원) 밑에서 허드렛일에 열심인 29살의 병구는 과거 여자친구와 연마했던 판소리 복싱으로의 복귀를 염원하고 있다. 지난 시절의 실수로 인한 부채감에 얼룩진 청년은, 또래 세대가 이제 더는 주목하지 않는 복싱과 판소리의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에게 진 감정의 빚을 갚으려 한다. 일명 ‘펀치드렁크’라 불리는 뇌세포손상증을 겪는 남자의 덤덤한 모험기인 <판소리 복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같은 실없는 농담을 일삼으며 쓸쓸한 청춘의 상태와 잊혀가는 문화를 나란히 놓아둔다. 성취가 요원해 보이는 꿈에 몰두하는 청년의 모습이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영화다. <밀정> <택시운전사> 등에서 활약한 배우 엄태구의 어눌하고 사랑스러운 연기가 돋보인다. 체육관의 신입이자 병구를 응원하는 민지를 연기한 배우 이혜리 또한 시종 경쾌한 에너지를 뽐낸다. 체육관으로 날아드는 연체료 고지서, 끊임없이 재개발 중인 서울의 풍경 등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 느린 삶을 살아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묘한 위로를 안긴다.
[단편] <졸업>
감독 한태희 출연 이유진, 한초원 제작연도 2017년
“우린 왜 이렇게 시답잖은 영화들을 좋아했을까?” 28살이 된 도연(이유진)에게 발신자 불명의 택배가 날아든다. 사실 도연은 지난 3년간 생일날마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영화 DVD 세장을 차례로 선물받은 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차례가 되어서야 도연은 깨닫는다. 세편 모두 한때 자신과 민아(한초원)가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였음을. <졸업>은 청춘의 만종 앞에서 불현듯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깨닫는 영화과 졸업생의 이야기다. 기억의 한편에서 찬란한 모습을 한 민아는 이제 더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군 전역 후 불청객처럼 찾아온 낯선 후배는 다단계에 빠져 있으며, 무엇보다 도연 자신은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온라인 리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상을 버티고 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졸업’의 감각 앞에서 쓸쓸해하는 주인공 도연은 체념과 무감각에 능한 밀레니얼 청춘의 초상이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스타일리시한 몽타주, 날렵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쓸쓸한 청춘 스케치.
[단편] <새벽>
감독 임정은 출연 정하담, 김혜윤 제작연도 2018년
새들은 꼬박 쉬지 않고 날갯짓을 했다, 라고 지수(정하담)는 논술 답안지에 적는다. 제시어는 ‘새벽’이다. 영화 <새벽>은 한편의 우화 같은 입사시험 답안지 속 작문 내용과 취업준비생 지수와 선영(김혜윤)의 답답한 나날을 중첩시킨다. 언론사 스터디 모임의 장수생인 지수는 다년간의 최종심 경험으로 소위 ‘고급 정보’를 주는 유력 멤버다. 함께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지수와 선영은 금세 친해지지만, 동기가 취업에 성공하자 분노와 좌절감에 힘들어하는 지수는 결국 선영과도 멀어지고 만다. <새벽>은 분초를 다투며 토익 단어를 외우고 서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는 취업 준비생들의 모임 속에서 날선 감정들이 엇나가는 순간을 포착한다. 조바심, 피로, 체념, 좌절, 의심 등 궁지에 몰린 젊은이들의 심리가 정하담, 김혜윤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력을 통해 피어난다.
시절과 역사
[장편] <시 읽는 시간>
감독 이수정 출연 오하나, 안태형, 김수덕, 하마무, 임재춘 제작연도 2016년
평범한 도시 생활 속 저마다 느끼는 소외와 고립감, 그리고 불안을 건드리는 다큐멘터리다.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서 상영된 <시 읽는 시간>은 5명의 화자들로부터 일상 속 균열과 상처를 엿본다. 남들과 똑같아 보이는 반복되는 일상 중에 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의 위기를 느낀다. 출판사를 그만둔 30대 여성은, 출퇴근길 버스 정류장에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의 피로한 얼굴에서 영혼의 소멸을 읽어낸다. 해고당한 노동자, 공황장애와 중년의 위기로 고통받는 50대, 출신과 국적을 이유로 차별받는 예술가 등이 잇따라 느릿하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편안하고 차분한 태도로 이어지는 고백들이 작품을 안정감 있게 채우고, 전혀 다른 갈래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던 목소리들은 시를 읽는 시간과 함께 점차 한곳으로 수렴된다. <시 읽는 시간>은 결국 시가 안겨주는 치유와 해소의 순간으로 나아가는 영화다. 연출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를 공동 연출한 이수정 감독이 맡았다.
[장편] <1991, 봄>
감독 권경원 출연 강기훈, 송상교, 강인옥 제작연도 2017년
다큐멘터리 <1991, 봄>은 1991년 이른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우리 시대로 다시 소환한다. 그해 4월 26일, 명지대 재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폭력 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노태우 정부의 불의에 항의하며 잇따라 김기설(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영균(안동대), 박승희(전남대) 등이 목숨을 끊자 정권은 전민련 총무부장인 강기훈을 모든 죽음의 배후로 몰아붙인다. 2015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주도로 최종 무죄선고가 내려지기까지, 한 사람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겁고 아픈 슬픔과 억울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1991, 봄>은 차분히 밝혀낸다. 감정을 절제하고 관조적 태도로 한국 근현대사의 치욕을 되짚는 영화는 일찍 떠나버린 열사들의 위령제이자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절절한 헌사다.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오와 부패의 지속까지 견지하면서 진실에 무감각해진 우리의 게으름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단단히 무게 중심을 지키고 선 연출자의 태도가 돋보이는 사회파 다큐멘터리다.
[단편]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감독 배꽃나래 출연 안치연 제작연도 2019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보려는 노력, 최대한 가까이 가닿아 이해하려는 노력은 종종 훌륭한 예술을 만들어낸다. ‘늦은 나이에 한글을 공부하는 귀여운 나의 할머니’로 시작한 배꽃나래 감독의 관심은, 감독 자신의 해외여행 경험을 통해 문맹의 심정을 체험하면서 보다 깊은 호기심으로 변화했다. 카메라를 들고 할머니의 한글학교를 찾은 손녀는 이윽고 그곳에 여성들만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마저 이해해나간다. 그들은 왜 배움에서 열외가 되었을까, 그리고 육신이 노쇠하는 긴 세월 동안 배움의 열망만큼은 왜 변하지 않았을까, 를 질문하는 다큐멘터리다. 더디고 서툴러서 더 뭉클한 감정을 자아내는 할머니들의 한글 배움기를 단정한 만듦새로 완성했다. 배꽃나래 감독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할머니들 각자의 사적인 기억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우리 각자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박하고 진실한 시선이 돋보인다.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단편상을 수상했다.
경계 위에 선 사람들
[장편] <스페셜 애니>
감독 김현경 출연 애니 올랜디, 김현경 제작연도 2015년
“(죽으면) 그냥 화장해줘. 그리고 내 재는… 지하철역에 뿌려주면 어떨까? 거기가 내가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는 곳이니까. 하하.” 영화가 시작되면 제목의 이유를 금세 납득하게 된다.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여자, 애니는 뉴욕 브롱스의 임대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중년 여성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헤아리기 힘든 폭력의 과거를 안고 있다. 김현경 감독은 뉴욕 유학 중 아무라도 좋으니 사람을 만나고 싶어 찾아간 교회에서 애니의 간증을 듣고 그녀의 삶에 매료된다. 10살 때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이후 스스로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방어하기로 결심한 애니는 심각한 마약중독을 겪고 1990년대 초 에이즈 판정을 받았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은행을 털다가 붙잡혀 교도소에서 복역했고, 지금은 관리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립시설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산다. 하지만 애니를 설명하는 공적 기록은 <스페셜 애니>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서로를 알아본 두 외톨이가 냄비 가득 마카로니 치즈를 만들어 먹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 공원을 활보하는 어떤 산책의 시간을 담는다. 빼앗긴 유년 시절을 이제야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애니의 솔직한 감정과 몸짓에 편견 없이 물들어가는 역동적인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애니를 거쳐 한국에 있는 자신의 엄마와 언니에 대한 감정을 보듬고, 차분한 내레이션을 통해 한편의 에세이를 완성한다. 상처와 가난, 병든 몸과 상실 속에서도 웃는 법을 잃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가 깊은 위로를 준다.
[단편]
<명태> 감독 이홍매 출연 강길우 제작연도 2017년
<은서> 감독 박준호 출연 김진이, 김미경, 김율호 제작연도 2019년
<다운> 감독 이우수 출연 김재화, 윤경호 제작연도 2018년
세편의 영화에서 사건은 갑자기 찾아온다. <명태>에서 배달 일을 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중국 동포 김수(강길우)는 우연히 현상금 수배자를 잡게 된다. 그는 곧 보상금을 받는다는 소식에 한국어반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고향의 요리를 대접하기로 한다.
<은서>는 탈북 후 남한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긴 주인공 은서(김진이)가 탈출에 성공한 엄마(김미경)를 갑자기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은서는 엄마의 존재로 인해 자꾸만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해진다. <다운>에서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 맞춰 살뜰히 아기용품을 준비 중인 부부(김재화, 윤경호)가 다운증후군이라는 기형아 검사 결과를 듣게 된다. <명태>의 남자는 주변의 몰이해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요리하고, <은서>의 모녀는 사회적 낙인을 견디는 방식으로 서로를 할퀴었다가 다시 화해한다. <다운>의 두 사람은 낙태의 기로 앞에서 온전히 공유되지 않는 감정적, 윤리적 딜레마로 난처해한다. 조선족, 새터민, 다운증후군처럼 사람의 상태는 쉽게 언어로 명명되지만, 영화는 그 너머의 정의되지 않는 움직임을 보려 한다. 출신, 장애, 성별 등 경계 위에 선 사람들을 조명하는 단편영화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