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거짓말쟁이!’
2020-07-13
글 : 강화길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EEWHA (일러스트레이터)

<속죄>의 1부 마지막 장면을 읽고 나면 늘 마음이 미어진다. 진부하지만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극심한 슬픔이 느껴진다.’ 영화도 마찬가지다.‘거짓말쟁이’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매번 그렇다. 아마 그건 내가 브리오니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마음은, 이야기의 후반부 등장하는 지난한 속죄의 감정이 아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면서 이해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이다. 그래. 거짓말쟁이의 마음.

13살의 브리오니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겸할 정도니 그 자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언 매큐언, 이 심술궂은 양반 같으니. 게다가 이 조숙한 소녀는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을 자기 방식대로 재구성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통찰력에 감탄한다. 나는 역시 대문호의 자질을 지녔어! 문제는 이것이 픽션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브리오니가 평생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확신한다. 우습게도 지금 나 역시, 어떤 확신을 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내가 <속죄>를 제정신으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브리오니는 후회했으리라. 일기장에만 썼다면 어땠을까. 그냥 희곡으로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편으로든 장편으로든, 어쨌든 노트에 글자로 적고 덮어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으로 만족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쓰면서도 나는 동시에 알고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면 애초 브리오니는 글을 쓰지도 않았을 거라고.

최근 나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떤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이 마음이 매우 연약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누군가 나를 쉽게 정의할 수 없게 하고 싶었고, 그 평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겠다고 늘 다짐해왔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결국 덫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글이 많이 읽히면 읽힐수록, 글을 쓰는 나와 실제 나와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타인이 정의하고 판단하는 ‘나’라는 인간이 진짜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때, 아마 매우 위태로워질 것이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인가? 그런 존재인가? 이게 진짜 나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위험부담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기 시작했던 거니까. 그리고 브리오니의 경우, 불행하게도 폭탄이 너무 일찍 터져버렸다.

나는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것.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것. 규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하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소녀는 그 확신으로 언니의 연인을 고발한다. 감옥에 보낸다. 전쟁터로 던져넣는다. 언니가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들과 절교하게 만든다. 말 그대로 그들의 인생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파국은 결국 브리오니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평생에 걸친 지난한 속죄로도 부족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가장 무서운 지점은, 사실 브리오니의 증언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매우 신뢰받는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더 분명하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지만, 사실 그 이야기가 통한 진짜 이유는, 소녀의 망상에 손을 들어줄 만큼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로비와 탤리스 가문은 가족이었다. 비록 로비의 어머니가 그 집안의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평등해 보였다. 로비는 대학에 다녔고, 의사가 될 예정이었다. 그는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열정이 있었으며 선의로 가득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그러나 브리오니가 ‘실수’를 저지른 순간, 그의 모든 것은 부정당한다. 그는 그냥 범죄자가 된다. 말 그대로, 남들이 규정한 ‘로비’가 그 자신이 되어버린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매번 놀란다. 어른인 세실리아가 아닌 어린아이 브리오니의 증언이 더 신뢰받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쉬우니까. 로비가 사건의 범인이 되는 것이 모두에게 좋으니까. 귀족들, 부유층들, 그들과 결탁한 부패한 무리. 나는 어쩌면 브리오니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아이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터질 수 있는 둑을 슬쩍 건드렸을 뿐이다. 애초 그녀의 자의식은, 그러니까 자신이 본 것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아니 그걸 눈치채지도 못한 순간 그녀는 진실을 듣게 된다.

거짓말쟁이!

고백건대,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날 나는 이 거짓말쟁이를 남몰래 질투했다. 브리오니가 평생 한 가지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갖은 은유로 포장하든, 스타일로만 무장하든, 결말을 회피하든,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이야기만을 썼다. 나는 탐이 났다. 일생에 걸쳐 계속 써내지 않으면 안되는 주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것 때문에 브리오니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알면서도 말이다. 그때의 나는 브리오니처럼 어린아이였다. 정신적으로는 분명 그랬다. 사물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은 그런 극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속죄>의 진짜 여정은 2부에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까 브리오니가 기꺼이 걸어간 진짜 삶 말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일을 바로잡기 위해, 계속 노력한 그 과정 말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결국 나는 이렇게 또다시 확신하고야 만다. 글을 쓰면서 벌어진 괴리는 오직 쓰는 것으로만 좁힐 수 있고, 나의 진짜 이야기는 현재가 아니라 삶의 최후의 순간 제대로 알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속죄>가 작가의 자의식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속죄>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며, 운명 앞에서 끝까지 고군분투한 인간의 집념을 그려낸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영화를 볼 때면 늘 마음이 미어진다. 이것은 확신이 아니다. 사실이다.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