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야구소녀'가 던진 젠더 사회학적 의제
2020-07-22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 <야구소녀>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교 투수 구속 130km/h. 프로에 진출하기엔 아쉽고 포기하기엔 아깝다. 국내 유일의 여성 고교 야구선수 주수인(이주영)은 이처럼 설정부터 경계적 인물이다. <야구소녀>는 이로부터 주수인이 프로 2군에 들어가는 결말까지, 좁은 복도에 선 첫 시퀀스부터 널따란 프로구장 마운드를 딛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경계 위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나아가 경계 자체를 묻는다. 여성과 남성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 경계는 어디인가. 그걸 경계라고 부르는 일은 온당한가.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라는 대사처럼 이 영화는 적극적으로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다(10대 남자애들이 우글거리는 고교 야구부라 하기엔 극중 공간 배경의 수컷성 또한 의도적으로 배제돼 있다. 프로팀 구단주도 마초가 아니다). 여전히 ‘교사’와 ‘여교사’를 분리해 말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이 세상에서, <야구소녀>가 던지는 질문은 변화구보다 직구에 가깝다. “내가 백삼십 던지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왜? 그게 왜 대단한 건데?”

여성으로서 대단한 일일 수 있지만 남성 선수와 분리된 취급을 받을 생각이 주수인에겐 없다. 문제는 매일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실의 분리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고 애매하다는 점이다. 시속 110km도 아니고 150km도 아닌 그의 구속이 그렇듯이. 학교 야구부에서 주수인은 로커룸 없이 화장실 한칸을 옷장 겸 사물함으로 사용한다. 이게 옳지 않다는 건 명백하다. 학교 당국은 비용을 들여 여성 선수를 위한 별도의 시설을 갖추는 게 맞다. 전지훈련 숙소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야구부 운영 예산으로 동등한 훈련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컨대 공중화장실의 여성 변기는 남성들이 사용하는 그것보다 3배쯤 많이 설치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말이다. 육상경기에서 성별을 분리하고 금메달도 따로 걸어주는 것이 현재로선 타당하다. 여기까지는 쉽다. 같은 권리를 위한 다른 기준이다.

존재론적 평등에서 인식론적 평등으로

그렇다면 주수인이 남성 선수와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이 평등인가.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서 헷갈려 한다. 혹자는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고 결론을 정해놓은 다음 현실의 모순에 부닥친다. 누군가는 남과 여가 어떻게 같을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이다 자신이 파놓은 흑백논리의 함정에 빠진다. 나는 권리를 위한 기준이 처지와 조건에 따라 세분화·개별화한 사회일수록 차별에서 멀어지는 사회라고 믿는다. 개인마다 조건이 다르므로, 그만큼의 정교함이 차별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흔한 성대결 미러링이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이분법이 거친 탓에 정교한 접근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구소녀>가 던지는 젠더 사회학적 의제다. 공동체 내 소수 성별을 위한 ‘별도의’ 전용시설을 설치하기. 업무에서는 품성이나 외모 등 주류 시선에서 정한 ‘별도의 기준이 아닌’ 능력으로만 평가하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는 ‘정교하게 평등한’ 인식론을 제공하기.

그래도 이중잣대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이중이 아니라 다중잣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당신이 한국에서 주류라고 생각하는 누군가는 어떤 백인의 눈에는 키 작은 유색인종으로 비칠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이지만 국내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대개, 경우에 따라 약자다. 주수인이라는 경계적 인물은 그래서 다중잣대의 세상 속 개별 존재를 넘어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인식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자치고는” 세계적으로도 몇 안되는 특별한 투수의 고군분투는 누군가의 눈에 “서커스”로 보이고 누군가에겐 빨리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핵심은 고교 야구부라는 주수인의 공간 배경이 절대적인 남성 중심 사회라는 점이다. 그곳에서는 남성이 인식조차 못하는 당연한 환경도 여성에겐 삶의 악조건이 될 수 있다. 방송을 장악하고 있는 주류 남성들이 걸 그룹의 성적인 군무를 당연하다는 듯 소비하는 사이, 피땀 흘려 연습하고도 “얼굴만 보고 탈락” 당하는 수인의 친구 방글(주해은)의 처지처럼 말이다.

집단 경험에서 떠올리는 동력

이 지점에서 주수인의 주변 인물들은 인식론적으로 각자의 기능을 맡은 수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물들은 공학적으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학교 섹터에 메인 캐릭터 최 코치(이준혁)와 서브 캐릭터 박 감독(김종수)이 있고, 맞은편 가족 섹터에는 엄마(염혜란-메인)와 아빠(송영규-서브)가 배치돼있다. 여기에 정호(곽동연)와 방글이 양쪽 섹터 언저리에 절친한 친구로 자리 잡았다. 인물들은 누구 하나 주류인 사람이 없고, 유일하게 주류 편입이 예정된 정호는 어릴 적 키 작고 약골이던 자신의 과거를 또렷이 기억한다. 각자의 이유로 주류가 정해놓은 시스템이 당연하지 않은 이들은,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모순을 인식하고 경계의 한가운데에 놓인 수인을 지지할 수 있다. 누군가 당연하게만 여겨온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인식한 데서 출발한 것이 최근 몇해 사이 한국 사회를 그나마 변혁시킨 여성주의의 힘 아니었던가.

현실은 말보다 어렵다. 여성 로커룸이 필요하다고 교육청에 아무리 하소연해도 학생 1명을 위한 예산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손가락이 터져라 훈련해도 주수인이 시속 150km를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야구소녀>는 마치 <슈팅 라이크 베컴>(2002)처럼, 바나나킥을 도모한다. 주수인은 박 감독의 말대로 “눈에 잘 안 보여서 그렇지 볼 회전력이 좋다.” 한계에 도전하는 성공 서사였다면 여기서부터 변화구를 훈련한 주수인의 승승장구 스토리로 날아가겠지만, 여성 서사로서 이 영화는 유리천장 아래 살아가는 한국 사회 다수 여성들이 딛은 땅을 공유한다. 프로 2군 입단 결정에도 “앞으로가 더 힘들 것”이라는 현실 인식 또한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극 종반 주수인만 바라보고 꿈을 키워온 후배가 있었다는 설정은, 언젠가 물결을 이룰지 모를 어떤 ‘동력’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 그런 집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구단 트라이아웃(입단 테스트) 현장에서 주수인의 낙차 큰 너클볼을 받는 포수가 말한다. “미트(포수용 글러브) 큰 걸로 바꿔야 돼요.” <야구소녀>는 겉보기처럼 편안한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류에 편승해 자극적 상술을 부리지도 않았다. 최근 돋보인 여성 서사 가운데에서도 성별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피해 경계를 찾아나선 논쟁적 작품이다. 여성주의의 핵심이 사이와 차이를 고려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임에도, 일각에선 페미니즘이 아닌 혐오 논리가 과다 표출되고 있는 요즘이다. 새로 던져진 질문을 제대로 받으려면 미트도 바꿔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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