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잔칫날' 김록경 감독 - 슬픔이 필요한 이들이 슬퍼할 수 있기를
2020-07-30
글 : 남선우
사진 : 백종헌

지난 7월 16일 막을 내린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4관왕이 탄생했다.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부문에서 작품상, 배우상(하준), 관객상, 배급지원상을 받은 <잔칫날>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 몰랐던 아버지의 빚을 알게 된 무명 MC 경만(하준)은 거액의 행사 섭외를 거절하지 못하고 삼천포로 향한다. 남편을 잃은 후 웃음도 잃었다는 팔순의 어머니를 한번만 웃겨달라는 효자 일식(정인기)의 미션을 받아든 채 최선을 다해 재롱을 피운 경만은 뜻밖의 사건에 발이 묶인다. 오빠의 사정을 모른 채 홀로 장례식장을 지키는 경미(소주연)는 상주가 아니라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잔소리만 들을 뿐이다. 산 사람들의 부탁과 요구에 아버지를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하는 남매의 3일을 그린 <잔칫날>은 어쩌면 그동안 부천에서 경험한 진홍빛 장르 색에 비하면 얌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영화다. 하지만 김록경 감독은 “우리의 일상도 판타스틱하지 않냐”며 영화를 부천에 출품한 이유를 말했다. <잔칫날>은 그렇게 잠잠하던 일상에 던져진 돌 하나가 만든 파장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서늘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길어낸 영화다.

-<파수꾼> <황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 활동해왔다. 연기를 하다 연출을 하게 된 계기가 뭔가.

=연기를 하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대부분 연출 일을 했다. 그들과 어울리다보니 글을 쓰고 싶어졌고, 글을 쓰다보니 자연스레 영상화하고 싶어졌다. 처음 연출을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역할이 뒤바뀔 줄은 몰랐는데, 글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콘티를 짜는게 너무 즐겁다. 지금은 연기보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2016년부터 단편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작할 땐 우여곡절이 있었을 텐데.

=영상편집도 할 줄 몰랐다. (웃음) 처음에는 친구한테 도움을 받다가, 직접 배워서 단편은 다 내가 편집을 했다. 지금도 컷을 자르고 붙이는 정도밖에 못하지만, 작품을 할수록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채워가는 것 같다.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한 <잔칫날>이 첫 장편이다. 주인공 경만을 연기한 하준 배우는 이 작품이 “김록경이란 사람의 일대기를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던데.

=중요한 감정 신을 준비하며 하준씨와 계속 얘기를 나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준 것 같다. (웃음) 내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을 뿐 내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편 <사택망처>를 준비하던 중 프로듀서 친구와 차를 타고 가다가 신나는 음악을 듣자고 이박사 노래를 틀었다. 그때 경만이가 할머니 팔순 잔치에서 행사하는 이미지가 그려졌고, 돈을 받기 위해 할머니를 웃겨야 하는 상황이 떠올랐다. 이미지를 발전시켜 작업을 하는 편이라 그날 바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경만이에게 왜 돈이 필요한지 답이 안 나와 시나리오를 덮어두고 있었다. 그러다 나한테 돈이 가장 필요했을 때가 언제였나 생각해보니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가 떠올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는 배경을 추가했다.

-장례식 신들의 디테일이 상당하다. 가족을 잃고 3일간 빈소를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계속해서 장례식의 옵션을 결정해야 하고, 불편한 손님들도 맞아야 한다. 고모들이 경미에게 하는 잔소리도 힘들었지만, 경만의 친구들이 나누는 부동산에 관한 일상적 대화도 야속하더라.

=실제로 아버지 장례를 치렀던 곳을 섭외해 촬영했다. 아무리 다른 공간을 그려보려고 해도 그곳의 구조 외에는 떠오르지가 않더라. 그리고 친구들의 대화는 결혼식에서나 장례식에서나 비슷하더라. (웃음) 부조를 어떻게 할까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는데, 나도 언젠가 그 친구들 각자의 입장이 다 되어봤던 것 같다. 그런 인물들이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나쁜 사람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잔칫날>이 누군가를 악역으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느낀게, 억울한 오해를 받던 경만은 결국 삼천포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는다. 부녀회장, 청년회장을 비롯한 인물들이 경만을 괴롭히는 것으로만 묘사되고 끝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 부분이 내 경험에서 나온 건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다른 가족들에게 있었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내가 하는 것만큼 아버지를 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가족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던 건데,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해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느낀 걸 반영해서,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한편 경미는 상주인 오빠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몰린다. 경미가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준 이유가 있다면.

=어른들이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결정을 요구하는 게 굉장히 한국적인 문화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경미는 잘못한 게 없다. 주변 사람들로 인해 경미의 감정이 쌓여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경미도 참을 수만은 없으니 터뜨리게 해주고 싶었다. 관객이 장례식장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경미를 보며 장례를 치르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봐주길 바랐다.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경미와 경만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으로 남겠지만, 한편으로는 남매가 부양에 대한 부담을 덜고 새로운 내일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하는 등 남아 있는 일도 많겠지만.

=오프닝 신이 또 다른 엔딩 신이지 않나 싶다. 경만이는 걸어 내려오며 우체통을 보고 경미는 밝게 경만을 부른다. 생활고는 계속되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경만 역의 하준, 경미 역의 소주연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눈을 많이 보는 편이다. 하준씨의 눈에서 경만이의 눈을 봤다. 슬픈데 슬퍼 보이지 않는 그런 눈이 있다. (웃음) 이 친구라면 나와 함께 드라마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경만이처럼 행사를 할 수 있는 분위기도 느껴졌다. 주연씨가 오디션에서 보여준 연기도 진심으로 와닿았는데, 무엇보다 이 시나리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와줬다는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이 대본을 쓴 분이 너무 궁금하다고 그러기에 내가 썼다고 말해줬다. (웃음)

-<벌새>에서 은희(박지후) 아버지를 연기했던 정인기 배우도 인상적이다. 경만에게 어머니를 웃겨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교육청 공무원 일식 역을 맡았다.

=처음부터 정인기 배우를 염두에 두고 일식 캐릭터를 썼다. 함께 배우로 활동했을 때도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 참 반듯한 이미지의 선배님이다. 그 안에 고생도 겪어본 이미지가 있는데, 시골에서 공부 잘해서 서울에 간 효자 일식 역할에 잘 맞겠다 싶었다. 일식은 아마 마지막에 경만이가 전해준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위안 삼아 살아가지 않을까. 그 말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일식은 스스로가 불효자라고 후회하며 살았을 것 같다.

-부천에서 만난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객석에서 들리는 울음소리 때문에 나도 눈물이 났다. 이런 반응을 바라며 만들었지만 관객의 슬픔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픈 거다. 그분들이 마냥 슬퍼서 울었다기보다 떠나보낸 사람과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지었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 연말 개봉을 목표로 준비 중인데, 관객이 본인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를 봐주셨으면 좋겠다.

-다음 작품도 궁금하다.

=<잔칫날>을 끝내고 장편 시나리오 두편을 썼다. 어떤 게 먼저 진행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나는 스릴러 장르의 영화고, 다른 하나는 가정폭력을 겪은 인물이 친구를 만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가는 내용이 될 것 같다. 비슷한 소재의 작품이 많아서 잘 다듬어볼 생각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