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진파' 데뷔 이후 줄곧 티베트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중국 감독 페마 체덴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2020-08-04
글 : 김철홍 (평론가)

영화가 시작되면 트럭 한대가 광활한 고원지대를 달린다. 아니 트럭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 땅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곳은 해발 5000m에 위치한 중국 시닝시 인근의 티베트고원. 트럭을 운전하는 진파(금파)는 아무 말이 없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창밖의 새를 보다가 실수로 지나가던 양을 차로 치어 죽이는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그 사체를 차에 싣고 다시 길을 떠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의 앞에 이번엔 한 젊은이(겐둔 호드사드)가 나타난다. 진파는 그를 옆자리에 태운 뒤 이야기를 나누는데 공교롭게도 젊은이의 이름 역시 ‘진파’이다. 어딘지 근심이 많아 보이는 그는 오래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복수하러 가는 중이라는 말을 한다.

진파는 젊은이를 목적지 근처에 내려준 뒤 자신의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그렇게 진파는 다음날 젊은이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 과 정에서 만난 찻집 주인은 진파에게 그 젊은이가 어제 이곳을 왔다갔으며, 진파가 찾는 사람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는 얘기를 전한다. 두 진파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진파>는 데뷔 이후 줄곧 티베트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중국 감독 페마 체덴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는 줄거리 소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잉여적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감독은 4:3의 화면비, 그리고 롱테이크와 롱숏을 활용한 촬영 방식으로 관객에게 황량한 티베트고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생생히 전달한다. 그런 측면에서 <진파>는 분명 한편의 체험영화로서 희소성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땅에서 인간은 절대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 원인은 영화 맨앞에 자막으로 제시되는 하나의 티베트 전통에 대한 문구 때문이다. 바로 티베트 사람들은 원한이 있으면 꼭 되갚아준다는 것. 원한이 있음에도 복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수치로까지 여겨진다는 이 말은 평생 원한을 품고 살아온 젊은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실수로 죽인 양에게까지 집착하는 진파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티베트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티베트는 단지 영화의 배경으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진파>라는 영화 세계의 규칙으로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 출신 감독인 페마 체덴은 영화 연출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소설가로서 티베트인의 삶과 문화를 전세계에 소개해왔다. <고요한 마니석>(2005), <타를로>(2015) 등 그가 연출한 영화들의 상당수는 자신이 쓴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들이다. 이번 영화 역시 그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영화는 이야기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에 더 눈이 가는 영화다. <진파>엔 익스트림 롱숏을 활용한 넓은 자연과 대비되는 작은 인간의 이미지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이 영화에서 서사가 차지하는 부분이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파>는 한편으론 그 지극히 작은 인간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원한이라는 감정에 대한 묘사와 꿈같이 표현되는 몽환적인 회상 장면들은 <진파>를 다른 것이 아닌 ‘진파’들의 영화로 보게 만든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두 남자가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순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때, 공기마저 희박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어렴풋이 헤아려보게 된다.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경쟁부문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국내에선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왕가위 감독의 제작 참여로 화제를 모았다.

CHECK POINT

미지의 땅 티베트

<진파>는 티베트를 배경으로, 티베트인에 의해, 티베트어로 만들어진 영화다. 티베트의 시장과 종교 활동을 하는 사원의 풍경뿐만 아니라, 찻집에서 먹는 음식과 손님을 대접하는 방법에 관한 것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티베탄 뉴웨이브

티베트 지역의 새로운 영화 흐름을 만들고 있는 페마 체덴 감독의 작품은 영화제에선 자주 소개됐으나 국내에 정식 개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영화는 앞으로 만나게 될 티베트영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O Sole Mio>

영화엔 <O Sole Mio>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극의 삭막한 분위기와 상반되는 이 노래가 영화에 꽤 어울린다. 거친 외모의 진파가 선글라스를 낀 채 이 노래를 티베트어로 부르는 장면이 영화의 또 하나의 구경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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