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세상 덕분에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을 강요할 수 없으니, 월별로 ‘말과 글 정량제’를 시행하면 좋겠다. 데이터처럼 정해진 양을 다 쓰면 더이상 떠들 수 없게 하는 거다. 이월은 허용하는 걸로다가.
연루의 정치학, 원인의 자리에서 사고하기
<부력>은 서구세계의 시선을 전제로 하는 영화다(편의상 서구세계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 제3세계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모든 국가를 포함하려 한다). 서구세계는 다양한 물류를 저렴하게 제공받기 원한다. 그 단순한 경제적 요구가 제3세계 노동현장을 폭력적으로 구조화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다. <부력>은 서구세계에 대해 단 한마디 없이 제3세계 노동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우리는 ‘원인이 생략된 결과’를 마주한다. <부력>은 우리에게 생략된 그 원인의 자리에서 사태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DA 5 블러드>는 역사적 비극을 낳은 원인의 자리에서 흑인을 삭제하려 한다. 보이지 않지만 그 원인에 연루되어 있는 서구세계를 환기시키려는 <부력>과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의 자리에서 흑인을 지워내려는 <DA 5 블러드>. 어쩌면 이 두 영화는 제3세계를 둘러싼 우리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인지도 모른다.
바보야,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야
로드 라스젠 감독의 <부력>은 타이 해안에서 자행되는 강제노역의 현장을 담는다. <부력>은 또래 아이들이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자신을 앞지를 때 무거운 짐을 이고 걷는 차크라(삼 행)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짓눌리고 뒤처지는 것, 그것이 소년이 처한 현실이다. 차크라는 타이의 공장을 탈출구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바다 한가운데고, 그에게 주어진 것은 허기를 달랠 식은밥과 더러운 물,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전부다. 배의 선장이자 절대 권력인 룸난(타나웃 카스로)이 지배하는 폭력과 착취의 세계. 차크라는 인신매매된 노예고, 차크라와 함께 끌려온 케아(모니 로스)의 말처럼 그곳은 지옥이다.
로드 라스젠은 ‘부력’이라는 제목을 통해 아무리 깊이 처박아도 다시 떠오르고야 마는 진실의 힘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을 흔적 없이 감출 수 있는 바다 한복판만큼 진실을 은폐하기 좋은 곳이 또 있겠는가. 로드 라스젠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광활한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룸난의 배를 반복적으로 대비시킨다. 이 익스트림 롱숏은 다층적으로 다가온다. 멀리서 룸난의 배가 아주 작게 보일 때, 배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착취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익스트림 롱숏의 시선은 제3세계를 바라보는 서구세계의 시선과 닮았다. 제3세계 노동 현장의 착취와 폭력은 서구세계가 구조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에 대한 시각적 거리감(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그 현실을 외면한다. 또한 익스트림 롱숏으로 완전히 고립된 감옥처럼 룸난의 배가 묘사될 때, 배에 승선한 모두가 갇힌 자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차크라 일행과 온갖 폭력과 착취, 살인까지 자행하는 룸난 패거리 모두가 감옥에 갇힌 자들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그리고 그 관계를 만든 보이지 않는 손. 그러니까 로드 라스젠은 이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가 이들을 이 관계에 갇히게 했는가, 라는. 오해는 말라. 나는 룸난 패거리와 차크라 일행이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배 안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계급적 위계가 존재한다. 선장실과 갑판의 인부가 위계화되고, 인부들 안에서도 캄보디아인과 미얀마인이 서열화된다. 하지만 익스트림 롱숏의 시선으로 이들의 배를 바라본다면, 그들은 모두 보다 큰 권력의 힘에 지배되는 미약한 자들이다. 먹이사슬의 완성. 로드 라스젠은 이 배 안의 현실을 미시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저 깊이 가라앉게 하는 것이 중력의 이치라면, 그렇게 감춰진 진실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부력의 힘 역시 세상의 또 다른 이치다. 이 부력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로드 라스젠이 의존하는 것은 영화의 원시적인 힘이다. 무언가를 찍어서 보여준다는 영화의 원 시성. <부력>은 철저하게 ‘표면을 기록하는 것’,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캄보디아, 미얀마, 타이 등의 다민족이 등장하는 영화답게, 영화는 대사와 드라마적 구성을 최소화하고 차크라에게 벌어지는 일을 냉정히 기록하는 데 치중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차크라를 보지만, 그의 생각과 심리 상태를 온전히 알기 힘들다. 우리는 차크라의 행동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갑판의 차크라는 위쪽의 선장실을 바라본다. 차크라가 선장실로 이어진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것은 룸난에게 물고기를 상납할 때뿐이다. 그런 차크라가 몇번의 살인 끝에 룸난이 지배하던 선장실을 차지한다. 그리고 갑판에 있는 룸난을 내려다본다. 이 시선의 역전을 두고 권력관계의 변화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장면은 권력자의 자리 교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폭력을 기반으로 한 권력의 자리는 여전한데, 단지 그 자리의 주인만 바뀐다. 어쩌면 룸난은 미래의 차크라고, 차크라는 과거의 룸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차크라가 살인으로 룸난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룸난 역시 그렇게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권력의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권력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자의 자리바꿈에 불과하다. 로드 라스젠은 폭력이 대물림되는 이 구도를 통해 개인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을 구조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으로 의미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부력>은 배 바깥의 시선을 통해 서구와 제3세계의 관계를, 그리고 배 안에서의 미시적 시선을 통해 제3세계에서 반복되는 악순환의 구조를 담는다.
하지만 폭력의 대물림은 개인 외부에서 강요되는 권력의 힘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부력>은 개인에게 강요되는 구조적 폭력과 착취를 들춰내면서도 인간을 단순히 그 구조의 꼭두각시로 바라보지 않는다. 차크라는 룸난(의 삶의 방식)을 증오하면서도 동경한다. 마초적 남성성을 과시하며 창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룸난을 몰래 바라보는 차크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장면 직전에 우리는 차크라를 돌봐주던 케아가 룸난의 패거리 중 하나를 제거하려다 구타당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케아를 바라보는 차크라의 시선은 경멸에 가깝다. 어쩌면 그 표정은 다짐이다. 그러니까 케아와 룸난은 차크라에게 제시된 두 가지 미래고, 그는 케아의 길을 경멸하고 거부한다. 그는 이제 인생의 문턱 하나를 넘었다. 그는 과거의 차크라가 아니다. 친구와 가족마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차크라의 악몽은, 그 스스로 예전의 자기가 아님을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갑판을 기어다니는 작은 게 한 마리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주던 차크라와, 자신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미얀마인을 죽이고 이어 룸난 일당까지 모두 죽이는 차크라를 과연 동일한 소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구조와 개인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며 차크라는 그 폭력적 구조의 일부가 된다. 비인간적 폭력과 착취의 구조는 그렇게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엔딩에서 차크라는 고향으로 돌아와 들판에서 일하는 가족을 멀리서 바라본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가족의 품에 안기는 차크라의 모습을 보여주었겠지만, <부력>은 가족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걷는 차크라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우리는 그의 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정하기 힘들다. 이 엔딩은 영화의 첫 장면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그러니까 길에서 시작한 영화는 길에서 끝맺는다. 무거운 짐을 이고 걷다가 자신을 앞지르는 또래를 바라보다 걸음을 멈췄던 차크라는 가족 앞에서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내딛으며 길을 떠난다. 그 걸음에 담긴 차크라의 무표정은 그의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지 쉽게 예단할 수 없도록 한다. 우리는 그저 차크라가 과거의 가족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다시 걷기를 선택했음을 볼 뿐이다. 거기까지가 차크라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이후는 차크라가 아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인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영화의 시작에서 차크라의 어깨에 놓였던 짐은 이제 우리의 어깨로 옮겨졌다. 우리가 그 걸음에 결부된 존재라는 것, 우리가 소년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로드 라스젠이 당신을 이 시선의 주체로 삼은 이유다.
스파이크 리의 자기기만적 상상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DA 5 블러드>는 영화 지면을 통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으니,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는 편이 좋겠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네명의 흑인 노병이 베트남에 돌아온다. 전쟁에서 숨진 ‘진격의 노먼’(채드윅 보즈먼)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전쟁 때 몰래 숨겨둔 금괴를 되찾는 일이다. 비행기가 추락하며 베트남 용병들에게 지급될 금괴를 손에 쥐게 된 다섯명의 흑인 군인은 전쟁이 끝나면 흑인들을 위해 쓰자며 금괴를 땅에 묻었다. 하지만 노먼은 전쟁에서 죽고 금괴의 행방도 묘연해진다. 몇십년이 지나서야 그들은 노먼의 유해와 금괴를 찾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금괴를 각자의 가방에 나눈 후부터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금괴를 처분해주기로 했던 데로슈(장 르노)의 배신으로 그들은 다시 한번 정글에서 전투를 치른다.
이 영화에서 ‘노먼’과 ‘금괴’는 대립적인 가치를 표상한다. 노먼이 현재 흑인 사회에서 상실된 (1960년대의) 이상을 은유한다면, 금괴는 그와 대립되는 세속적인 욕망을 대변한다. 스파이크 리 감독이 보기에, 지금의 흑인 사회는 노먼이 아니라 금괴가 지배한다. 노먼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폴(델로이 린도) 이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는 것이나 금괴를 찾은 후 동료와 아들을 버리는 모습 등은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 찢겨져버린 지금의 흑인 사회에 대한 스파이크 리의 논평(또는 한탄)에 가깝다. <DA 5 블러드>는 베트남전에 반대했던 무하마드 알리의 인터뷰 영상을 비롯해, 흑인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다큐멘터리 자료를 삽입한다. 백인을 위한 총알받이여야 했던 베트남전은 흑인에게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상수였다. 베트남전의 회상 장면에서 그들이 늙은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이다(전쟁에서 죽은 노먼만 젊은 모습이다). 이는 네 노병이 전쟁의 트라우마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때의 처지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파이크 리는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을 표상하는 노먼의 가치를 현재의 시간에 되살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노먼을 흑인 인권운동의 계몽적 가치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도록 단선적으로 구성한다. 이는 스파이크 리에게 <DA 5 블러드>가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의 영화라는 의미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허구로서의 영화보다 프로파간다로서의 영화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라, 이러한 영화적 태도 자체를 문제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흑인에게 물리적, 비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던 미국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흑인들이 연루된 또다른 폭력에 침묵하려는 태도만큼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그것은 스파이크 리에게 미학 그 이상의 문제기 때문이다. 폴의 이야기처럼, 미국 인구의 10%를 조금 넘는 흑인이 베트남전 참전 군인의 30%를 차지했다. 스파이크 리가 보기에 흑인은 이 “부도덕한 전쟁”의 희생자다. 미국에서 흑인의 처지는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를 참고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감옥마저 산업화한 미국은 그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흑인을 범죄자로 생산, 공급한다. <똑바로 살아라> 등에서 스파이크 리는 이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지적했고, 이를 통해 그는 블랙시네마의 리더로 자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는 미국 사회 내에서 흑인과 백인이라는 이자 관계를, 그러니까 백인 주류사회의 희생자로서의 흑인 인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DA 5 블러드>에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베트남인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단순한 블랙시네마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삼자 관계 안에서 흑인은 희생자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흑인은 그저 희생자라는 주장이 과연 베트남인에게 유효할 수 있는가? 베트남이 흑인 인권운동의 가치를 계몽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배경이나 수단에 불과하다면, 자신이 그토록 비웃는 <람보>와 무엇이 다른가?
호찌민의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바에서 네 노병 앞에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은 소년이 등장하고, 오티스(클라크 피터스)는 미처 알지 못했던 혼혈 딸과 마주하며, 전쟁 때 가족을 잃은 시장 상인은 악다구니를 쓴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그 비극이 다큐멘터리 자료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스파이크 리는 전쟁의 상흔이 여전함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이들의 상처 앞에서 흑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삼자 관계 속에서 이자 관계의 논리만 반복한다. <DA 5 블러드>는 그 엔딩에서 오티스가 자신의 딸을 안아주고, 금괴의 일부가 지뢰로 희생된 베트남인을 위해 기부되는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흑인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적 상상’일 뿐이다. 애초에 흑인의 것도 백인의 것도 아니었던 금괴를 전리품 하사하듯 베푸는 태도는 관용이 아니라 오만이다. 오티스는 몇십년간 그 존재를 몰랐던 딸과 포옹으로 화해한다.
활짝 웃으며 오티스를 안아주는 딸은 그렇게 아버지(흑인)를 용서한다. 하지만 만약 띠엔이 수변 시장에서 폴과 다투던 닭을 파는 상인처럼 힘겹게 상흔을 짊어지고 살고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도 쉬운 화해가 가능했을까? 스파이크 리는 베트남과 흑인의 화해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는 쉬운 화해가 가능한 상황 속에 띠엔과 딸을 배치해놓고, 그것이 아무 갈등 없이 가능한 척 관객을 속인다. 베트남은 흑인에게 희생자의 자리를 부여하기 위한, 또는 흑인을 면죄하기 위한 상상적 도구에 불과하다. 흑인을 면죄하는 서사를 위해 베트남은 다시 한번 희생된다. 스파이크 리가 베트남 여인의 목소리를 빌려 흑인 군인에게 말을 거는 것 역시 자기기만적 상상에 불과하다. 흑인 군인을 대상으로 라디오방송을 하는 베트남 여인(응오 타인 반)이 등장하는 장면은 보다 비현실적인 질감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녀는 왜 흑인이 백인의 전쟁에서 목숨을 버리는지 묻기도 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을 전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마빈 게이의 음악을 들려주기도한다. 이 베트남 여인의 역할은 베트남전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고, 흑인이 백인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베트남은 흑인의 면죄를 위한 도구가 된다.
스파이크 리는 엔딩에서 랭스턴 휴스의 시 <Let America be America Again>을 인용하는 킹 목사의 연설을 보여준다. 나는 <DA 5 블러드>를 관람할 무렵 에이미 추아의 <정치적 부족주의>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책 역시 휴스의 시로 마무리한다. “내게 미국은 미국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맹세한다/ 미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휴스의 시는 (에이미 추아의 말마따나) ‘자유의 약속과 모든 개인을 위한 희망’인 아메리칸드림의 노래다. 하지만 이 꿈을 이야기하는 영화마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더 나아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삭제하려 한다면, 그 꿈이 실현된 국가라고 해도 과연 기대할 것이 있을까? 수전 손태그의 이야기처럼, 연민이 누군가의 고통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느끼는 (어느 정도는) 뻔뻔한 감정이라면, 우리는 이 연민을 넘어서는 ‘연루의 정치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부력>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