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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 - 그 시절의 꿈과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2020-08-13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기자님, 저 오늘 게임 캐릭터처럼 입고 가도 되나요?” 이른 아침 도착한 박윤진 감독의 문자에 머릿속에서 ‘내언니전지현’의 여러 모습이 고속재생됐다. ‘내언니전지현’은 1999년 론칭된 넥슨의 MMORPG게임(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일랜시아> 속 박윤진 감독의 캐릭터다. 2000년대 초반 반짝 전성기를 누린 이후 이용자가 다수 빠져나간 이 고전 게임은 넥슨이 서버 유지는 하되 2008년 이후 업데이트는 그만둔 실정. 그런데 이 유령 왕국에 최근까지도 많으면 수백명대까지 동시접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도대체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박윤진 감독은 우선 가까운 유저들을 만나서 그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감독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과도기 속에 놓인 2030의 정서를 배회하는 다큐멘터리로,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벌과 인디포럼 공개 이후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게임 유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찍은 다큐멘터리는 국내 최초다.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영화과 졸업을 앞두고 내가 가장 찍고 싶은 게 무엇인지 고민했다. <일랜시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찍고 싶더라.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지?’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학교 밖에서 영화를 잘 모르거나 혹은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마침 미디액트 독립다큐멘터리 워크숍을 신청했고, 우선 가까운 길드원들부터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일랜시아>를 계속하는 이유는 요즘 게임에 비해 눈이 덜 아프고 용량이 적다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씁쓸한 고찰까지 있다.

=막상 사람들을 만나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일랜시아>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결핍을 메우고 있더라. 매크로가 주는 효과 같은 게 있었다. 반복 행위가 주를 이루는 <일랜시아>는 매크로에 최적화되어 있는 게임인 셈인데 이용자가 직접 플레이하지 않아도 숫자가 계속 올라가 묘한 만족감을 준다. 나 역시 귀가하면 일단 <일랜시아>를 켜두고 다른 일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언가를 이루기 힘든 시대에 <일랜시아>가 채워주는 충족감이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다큐멘터리의 방향도 넓어졌다.

-유년기에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며 게임을 시작한 세대의 특성을 조망하기도 하고, 열렬한 <일랜시아> 유저로서 게임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제기도 하는 등 화자의 시선이 여러 각도와 거리로 조정된다. 다만 감독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없더라.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모든 말들에 복합적으로 해당되는 존재로 나를 남겨두고 싶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 남동생의 소개로 <일랜시아>를 시작했는데, 게임 안에서는 빠르게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됐다. 어른이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게임에선 내가 노력하면 금방 미용사가 될 수 있었다. 수험생 때 게임과 잠시 멀어졌지만 ‘수능 끝나면 <일랜시아>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친구와 조직한 게임 내 길드를 통해 오프라인에서 친목 모임을 갖는 등 또 다른 자유와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했다.

-현실이 피로할수록 자유도, 성취감, 안정감이 중요한 게임들이 사랑받는 것 같다. 최근 <동물의 숲>이 유행하는 것처럼.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일단 <일랜시아> 안에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언제든지 접속만 하면 요리를 할 수도 있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키우고 변화시킬 수 있다. 현실 세계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즉각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게임에 비해서 경쟁은 약하고 유저들끼리 경계심도 덜하다. 또 한 가지는, 내 경우 <일랜시아>를 하면서 사람과 관계 맺는 법을 배웠다. 혼자 있는 게 편한 성향이었는데 <일랜시아> 안에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정말 재밌는 거다. 왜 그럴까, 고민해봤다. 나이, 성별, 직업 등 아무 정보도 없는 채로 익명으로 만나서 채팅하기 때문인 것 같다. 현실에선 대화의 공백이나 어색함을 채우기 위해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을 때도 있지만, 게임 안에선 솔직하게 대화 주제와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현실 원리에 포섭되지 않고 서로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해주기도 한다.

-모 방송국 가요 프로그램이 유튜브 실시간 채널로 인기를 끄는 등 이른바 ‘탑골 콘텐츠’가 흥행했다. 90년대생들이 왜 향수에 잠길까.

=그때 그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할 당시의 내 상태를 떠올리는 것 같다. 나는 커서 무언가 될 수 있겠지, 라고 걱정 없이 무리 없이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혹은 그 시절에 내 안에 있었던 열정을 되찾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나는 지금 무엇에 열광하고 있지?’ 되물었을 때 대답하기 어렵다. 얼마 전 친구들과 “우리 아무라도 괜찮으니 연예인이라도 좋아해볼까?” 하고 농담하기도 했다.

-길드원들이 게임 맵의 절벽에 모여서 자기소개를 하고 차례로 떨어지는 놀이를 한다. 캐릭터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모습이 기이한 이미지로 남았다.

=절벽에서 추락하면 <일랜시아> 안에 있는 6개 섬 중 하나로 랜덤으로 떨어진다. 길드원들을 떨어트려놓고 내가 마지막에 뛰어내리는데, 나와 같은 섬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품을 주는 등 그냥 사소한 놀이다. 은유하자면 나는 우리가 절벽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할 게 없으면 돌고 돌아 <일랜시아>에 다시 찾아왔을까. 다들 이런저런 콘텐츠로 채워지지 않으니 옛날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절벽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

-악성 유저로 인해 게임 이용이 어렵게 되자 직접 넥슨 본사를 찾아간다. 왜 노조인 스타팅포인트부터 만났나.

=스타팅포인트 외에는 응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일랜시아> 유저들도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버그와 악성 유저에 대한 관리만이라도 요구하는 것처럼, 노조도 노동자에게 기본적인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떤 동질감, 용기를 얻은 것 같다. 누군가가 움직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만남 이후로 영화 후반부 작업을 더 힘 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의 총합으로서 감독인 ‘나’와 ‘내언니전지현’은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내언니전지현이 본캐고 내가 부캐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내가 굉장히 사랑하는 내가 있고 내언니전지현은 그 추상이 구체화된 존재다. 현실의 나는 부족한 게 많은데 내언니전지현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앞으로도 내언니전지현이 하고 싶은 걸 다 했으면 한다.

-인디다큐페스티발 공개 이후 12년 만에 넥슨이 반응을 보였고 <일랜시아>에 이벤트도 열렸다. 개봉은 언제쯤으로 예상하나.

=넥슨이 생각보다 빠르게 나서줬다. (웃음) 개봉은 빠르면 이번 가을. 올해 영화제 공개 이후 진척된 상황들에 대한 푸티지도 조금 더 덧붙여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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