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69세' 성폭행을 당한 69살 여성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
2020-08-18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69살의 효정(예수정)은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29살의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충격과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애써 추스르던 효정은 고민 끝에 용기를 내 경찰에 신고한다. 효정과 함께 사는 시인이자 책방 주인 동인(기주봉)은 그런 효정을 돕는다. 그러나 효정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경찰에 불려온 중호는 성폭행이 아닌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69살이라는 나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는 효정을 궁지로 몰아간다. 법원은 나이 차이를 근거로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중호의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주변 사람들은 효정을 치매 환자로 의심한다. 한편 동인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들 현수(김태훈)와 갈등을 겪는다. 연이은 고통 속에서 효정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다다르는데, 뜻밖의 계기로 다시 용기를 내보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단단한 걸음을 내딛는다.

임선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69세>는 성폭행을 당한 69살 여성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위로 정형외과를 찾은 효정과 병원의 간호조무사 중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색한 긴장을 품고있는 대화가 불편한 침묵으로 끝이 나고, 이후 관객은 효정이 그날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가 관심을 두는 것은 자극적인 폭행이 아닌 ‘그 이후’의 변화다. 영화는 구체적인 폭행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효정의 변화를 담아낸다. 일상생활을 하는 효정의 의식 속으로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빨간 불빛 이미지가 문득문득 비집고 떠오르며 괴롭힌다. 그러나 트라우마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경찰에 신고하기로 마음먹은 뒤 마주하게되는 세상의 반응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들은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언행으로 효정과 동인을 곡해한다. 영화는 그런 주변 사람들을 선인도 악인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우리 사회의 냉담한 얼굴을 은유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2013년 우연히 여성 노인 대상 범죄를 다룬 칼럼을 보게 된 임선애 감독은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69세>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노인 주인공이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스스로의 명예와 존엄을 지켜나가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다. 젊은 조력자 캐릭터를 넣어보라는 주변의 말에도 감독은 노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실제로 <69세>에는 적극적으로 사건 해결에 나서는 열정적인 변호사나 혈기 왕성한 활동가는 등장하지 않는다. 방어막이나 버팀목 없이 무력감, 좌절감, 억울함 등 여러 감정을 맨몸으로 겪는 효정은 때로는 분노하며, 때로는 냉정하게 스스로를 지켜나간다. 효정 곁에서 그를 도우려 노력하는 동인도 효정 또래의 노인이다. 동인 역시 극중에서 그의 나이와 관련된 조롱을 듣는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두 마디의 말과 시선에 효정과 동인이 느끼는 고통이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효정은 초반엔 그런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는 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좌절과 무력감 끝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낸 효정의 마지막 선택은 관객에게 질문과 여운을 남긴다. 나이, 지위, 직업과 상관없이 기본적 인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는 것, 편견과 차별 같은 사회 폭력에 좌절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 효정의 용기와 의지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메시지를 건넨다. 영화 속 대부분의 배우들이 역할에 어울리는 연기를 펼치지만,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주인공 효정 역의 배우 예수정이다.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영화를 함께 만들어나간 예수정은 차분하면서도 굳건한 효정 역을 더없이 알맞게 연기하며 영화적 몰입도를 높였다. 효정을 돕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겪는 동인 역의 배우 기주봉 또한 특별한 존재감으로 영화에 안정감을 더한다.

CHECK POINT

임선애 감독

임선애 감독은 <여자, 정혜> <화차> <남한산성> 등 수십편의 영화에서 스토리보드 작가로 활동했다. 2002년 <오버 더 레인보우>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나쁘지 않아> <그거에 대하여> 등의 단편을 거쳐 첫 장편 <69세>를 연출했다. <69세>는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관객 상을 수상했다.

두 배우의 만남

동갑내기 배우 예수정과 기주봉이 호흡을 맞췄다. ‘오래된 동지’같은 사이인 두 배우는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또 서로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효정과 동인 역할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연기했다.예수정의 정갈하고도 깊이 있는 연기는 호소력을, 기주봉의 인간미 넘치는 분위기는 온기를 보탰다.

69세

영화의 제목인 ‘69세’는 임선애 감독이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있는 나이를 생각하다 짓게 된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처음에 막연히 노인으로만 정해놓았던 주인공의 나이를 고민하던 중 60대와 70대의 경계에 있는 ‘69세’를 선택하게 됐고, 그것이 곧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