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힐링’이라는 단어에 다 담기지 않는 <블루 아워>의 미덕
2020-08-19
글 : 오진우 (평론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가운데 놓고 이제 양옆으로 푸른색을 띤 영화들이 있다. 그 영화들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와 <블루 아워>(2019)다. 3편의 영화들이 칠하는 푸른색의 농도는 짙게 시작하여 옅어진다. 영화가 그리는 그러데이션 속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서있다. 여기서 푸른색은 ‘새벽’이란 시간을 의미한다. 새벽은 미지의 가능성을 품은 시간이다. 언뜻 영화 속 청춘들은 이 시간대에 갇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들은 새벽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맞이한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마지막에서 주목할 것은 신지(이케마쓰 소스케)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얼굴 숏보다 하나의 대상을 함께 바라보는 시점숏이다. 프레임의 절반이 가려진 신지의 시점숏은 미카의 시점숏에서 개안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상인 꽃은 전보다 클로즈업된다.새벽을 지나 핀 꽃은 신지가 말했던 ‘터무니없는 좋은 일’의 암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끝에서 나(에모토 다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는 서로를 바라본다. ‘나’는 사랑을 고백하고 사치코는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관객은 사치코의 알 수 없는 표정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두 영화 모두 ‘사랑’이란 감정 속에서 가능성을 점쳤다. <블루아워>는 사랑 대신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는 마지막 반전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설계해놓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스나다(가호)는 조수석에, 기요우라(심은경)는 운전석에 앉아 있다. 스나다는 기요우라를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운전석에 자신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동일 인물이란 가능성 대신 스나다의 뒤돌아보는 몸짓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과거와 대면하기 위하여

이야기에 앞서 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부터 전제하고자 한다. 기요우라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도깨비’다. 그녀는 스나다의 어떤 면모를 지닌 채 인간으로 육화한 인물이다. 이들은 여행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도 만나고 흙길도 밟는다. 점차 더러워지는 스나다의 신발과 달리 기요우라의 허연 리넨 소재의 옷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다. 이러한 기이한 설정은 <기묘한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처럼 느껴진다. 넷플릭스가 아닌 일본 드라마 말이다. 또한 배우 심은경이 출연해서인지 몰라도 <은비까비의 옛날옛적에>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스나다의 뒤돌아보는 몸짓은 꿈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녀의 꿈에 나타나는 공간은 그녀의 고향 ‘이바라키’이고 시간은 새벽녘이다. 새벽녘에 어린 스나다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닌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 스나다의 꿈에서 삶으로 틈입한다. 과거의 자신을 뒤돌아본다는 것은 현재의 불만족에서 기인한다. 현재의 스나다의 삶은 균형이 깨진 지 오래다. 촬영감독과의 불륜, 남편과의 권태기,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서 말이다. 꿈에서 과거를 뒤돌아보는 몸짓은 수동적이지만 삶의 ‘새로운 균형’을 원하는 그녀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스나다의 작은 바람을 이뤄줄 귀인이 필요하다. 기요우라가 그 역할을 맡는다. 두 사람은 친구이지만 어떻게 친해졌는지 알 수 없다. 기요우라의 등장은 특이하다. 영화는 회식 자리에 있는 스나다와 방 안의 기요우라를 교차로 몽타주해 마치 기요우라가 스나다의 마음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묘사한다. 둘은 이후 카페에서 만나 담소를 나눈다. 밖으로 나온 이들은 기요우라의 파란색 중고차에 탑승한다. 때마침 스나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그날 오후에 고향 집에 내려갈 것이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한다. 이를 들은 기요우라는 스나다의 고향인 ‘이바라키’에 여행 가자고 즉흥적으로 제안한다. 스나다는 내심 꺼렸지만 운전대는 기요우라가 쥐고 있었다. 이들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꿈에서 과거를 ‘보기’만 했던 스나다는 이제 기요우라의 도움으로 과거의 자신과 직접 대면하려고 한다.

하지만 스나다에게 큰 장벽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두껍게 깔린 사회적 가면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이 가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고 그동안 숨겨왔던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촌스러움이다. 술집에서 가면에 가장 큰 금이간다. 술집 직원은 세련된 스나다를 칭찬한다. 이에 애써 웃는 스나다의 표정을 보고 술집 사장은 추하다고 지적하며 습관이 되니 조심하라고 말한다. 이에 화가 난 스나다는 핸드폰을 집어던진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가면을 깬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면을 쓴 채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려 한다. 술집에서 돌아온 후, 스나다는 새벽에 잠에서 깬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뛰기 시작한다. 영화는 스나다의 과거와 현재를 트래킹숏으로 몽타주하여 이어달리는 모습을 연출한다. 현재의 스나다는 무언가에 걸려 잠시 멈추고, 과거의 그는 좀더 달려간다. 결국 이어달리기는 실패로 돌아간다. 카메라는 푸른 새벽을 배경으로 스나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담아낸다. 스나다의 달리기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녀는 역시 새벽에 갇힌 셈이다. 스나다가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봤을 때, 기요우라가 하얀 광채를 뿜으며 손을 흔들고 서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자신의 촌스러움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스나다의 심리적 거리감을 의미한다.

속도 줄이기의 방법론

여행이 끝나고 도쿄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스나다는 기요우라에게 자신이 촌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인정은 스나다의 뒤돌아보는 몸짓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백미러로 보지않고 직접 몸을 돌려 뒤창을 바라본다. 앞창에는 해질녘이, 뒤창에는 새벽녘이 펼쳐진다. 뒤창에 새벽녘에 뛰어노는 어린 시절의 스나다가 인사를 고한다. 이 인사는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이제 인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스나다에게 일종의 깨달음의 시간을 선사해준 기요우라는 이제 사라졌다. 그녀의 마지막 선물은 아마도 운전석으로 스나다를 이동시킨 걸 테다. 스나다는 이제 뒤돌아보기를 멈추고 앞을 바라보며 현재의 삶에 부닥쳐야 한다.

<블루 아워>의 엔딩 시퀀스는 <버닝>의 엔딩 시퀀스를 떠오르게 만든다. 종수(유아인)는 소설을 쓰기엔 경험과 상상력이란 곳간이 텅 빈 상태다. 그래서 그는 벤(스티븐 연)의 곳간인 비닐하우스를 뒤지기 시작한다. 벤은 새벽녘을 달리는 종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다. 종수가 벤을 죽이고 태우는 것은 자신만의 소설을 쓰려는 의지의 몸짓이다. 알몸이 되어 그는 트럭에 탄다. 트럭의 앞창엔 서리가 잔뜩 앉아 있고, 뒤창엔 아직도 불이 피어오르고 있다. 그 역시 뒤를 돌아보지만 스나다의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나다는 자신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고 성장을 한다. 직장 동료의 말처럼 그녀는 너무 달려서 멈추면 죽기 때문에 영화는 감속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기요우라가 그 속도를 줄여준 셈이다. 이제 기요우라는 없다. 스나다는 마냥 뒤를 볼 수 없다. 이제 스나다는 앞에 놓인 문제들을 온몸으로 맞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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