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나를 구하지 마세요' 충무로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정연경 감독의 데뷔작
2020-09-01
글 : 김소미

부모의 주도로 자녀를 포함한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를 두고 ‘동반 자살’이라 할 수 있을까. 자녀가 미성년일 경우 특히 부모의 결정에 의해 생명권이 박탈된다고 보고 이를 ‘자녀 살해 후 자살’로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나를 구하지 마세요>를 보고 있으면 이처럼 계발된 사회윤리적 의식이 잠시 무색하게 느껴진다. 정연경 감독의 영화는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에 의해 죽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는 제목 뒤에는 영화가 숨겨놓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라는. 이 영화는 주인공 선유(조서연)가 그 대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12살 선유를 휘청이게 하는 최초의 트라우마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빚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날의 기억, 소녀는 그곳에 붙잡혀 있다. 들것에 실린 아빠와 울부짖는 엄마를 지켜보던 강가의 풍경을 자주 되새기면서, 선유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 말없이 드나든다. 밤이면 유흥가의 불빛이 어지럽게 들이치는 상가 건물에 셋집을 마련한 모녀의 삶은 녹록지않다. 엄마 나희(양소민)는 빚에 시달리며 고깃집에서 일하는데, 주변의 독촉과 생활고로 내면은 이미 피폐해진 지 오래다. 영화는 초등학생인 딸 선유에게 술을 권하고, 경제적 사정을 있는 그대로 공유하며, 우울과 불안을 전가하는 나희를 담담하게 묘사할 뿐 인물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선유가 처한 오래된 폭력의 그늘도 분명히 직시하도록 만들 뿐이다.

이처럼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선유가 만나는 어른의 다양한 초상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빌려준 돈을 받으러 자주 찾아오는 엄마의 친구, 돈을 갚아달라고 불쑥 찾아온 선유에게 봉지 가득 먹을거리를 담아주는 슈퍼마켓 아주머니 등 역할이 작은 배역에게도 저마다의 쓸쓸함이 있음을 표현했다. 어른들 또한 제각기 생활감 있는 디테일을 부여해 감당하기 힘든 1인분의 고통을 안고 씨름하고 있다는 태도는 <나를 구하지 마세요>의 미덕인 한편 문제적 접근으로도 다가온다.

미성년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어른의 무책임함이 너그러이 허락될 때, 아이들의 행복은 훨씬 더 쉽게 무력해진다. 그러니까 선유는 심약한 보호자 아래서 너무 많이 알아버린, 그래서 짐짓 씩씩한 얼굴로 모른 척도 할 줄 아는 소녀다. 영화는 점점 더 많은 부담에 짓눌려 바싹 말라가는 인물의 외양 변화까지 섬세히 묘사하면서 절박한 감정을 고조시킨다.

가난한 모녀의 암담한 서사와 발을 맞추는 건 놀랍게도 첫사랑을 막 시작한 소년의 쾌활한 멜로드라마다. 같은 반 뒤편에서 남몰래 선유를 훔쳐보며 짝사랑하는 소년 정국(최로운)은 특유의 천진난만한 기색으로 선유를 곧잘 당혹시킨다. 때마침 나타나 우산을 씌워주고, 귀찮게 선유 주변을 맴돌며 동행을 자처하는 소년. 모자랄 것 없이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온 소년이 선유를 그늘에서 끌어내어 햇볕 쪽으로 잡아당긴다. 정국의 첫사랑 사수 대작전이 영화에 묘한 활기를 띠우며, 교조적이거나 작위적인 뉘앙스 없이 희망을 심어주는 효과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때로는 온전히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성장 서사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도 있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어른의 가난 때문에 자기 욕망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아이가 또래 아이로부터 생명력을 얻는 모습이 특별히 뭉클함을 안긴다. 201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8회 피치&캐치에서 극영화 부문 대상인 메가박스상을 수상했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역도산>(2004) 등 충무로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정연경 감독의 데뷔작이다.

CHECK POINT

슬프고도 문제적인

정연경 감독은 2016년 9월 대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실화를 모티브로 영화를 제작했다. 낙동강 하류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모자의 집에는 자신을 구하지 말아달라는 아이의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정연경 감독은 여행의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순순히 엄마를 따라나선 아이의 심정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장면을 휘감는 연기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종종 괴로운 이야기를 잊게 만드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기억될 영화다. 천진난만하다 못해 능글맞기까지 한 소년 정국은 <해피 투게더>(2018)에서 활약했던 최로운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캐릭터다. 꾸밈없이 깨끗한 연기를 선보인 선유 역의 조서연은 특히 독립영화의 새로운 기대주로 거듭날 듯하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선유와 정국, 두 사람이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눈앞의 모든 것들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청량하다. 초등학교를 무대로 10대 초반의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묘한 감정의 기류를 담아낸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순수한 소년, 소녀의 사랑 혹은 우정이 일으키는 감흥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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