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뉴웨이브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어김없이 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다. 2000년대 초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으로 영화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그의 존재를, 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로 처음 접했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얼마나 뜨겁게 영화를 사랑했는지 회고하는 영화평론가, 기자,영화감독들의 추모사는 정은임이라는 사람과 그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추모하는 이들이 제작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방송의 mp3 파일을 뒤늦게 웹으로 다운받아 들으며, 나는 대만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영화를 보기도 전에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미 한참 전에 종영된 라디오 프로그램의 녹음본을 들으며, 아직 보지도 못한 영화를 만든 감독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마주하며 느낀 감정이 아니라, 과거에 찬란하게 빛났을 그것들을 직접 체험한 누군가의 감정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이 기묘한 감정의 근원에 대해서는 이번호에 실린 <남매의 여름밤> 평론에서 송경원 기자가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이미 관객 또는 평단으로부터 검증된 과거의 영화들이 극장 예매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며, 방대한 구작 아카이브를 자랑하는 OTT 플랫폼의 존재가 낯설지 않은 2020년을 살아가는 관객도 한번쯤 곱씹어볼 만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불현듯 우리를 찾아와, 이제는 더이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담고 있지만 여전히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질감과 정서로 마음을 뒤흔드는 과거의 영화들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34년 만에 한국 관객을 만나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1986년작 <공포분자>의 개봉과 더불어 대만 뉴웨이브 영화가 남긴 유산을 반추하는 특집 기사를 준비한 이유다. 이번호에서는 특히 대만 뉴웨이브 영화가 세계영화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1980년대를 경험하지 못했으나 다양한 측면에서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연상케 하는 영화를 만든 90년대생 신인감독들-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 전주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작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신동민 감독, 2020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과 연기상을 수상한 <우리의 낮과 밤>의 김소형 감독- 의 대담에 주목해주셨으면 한다. 각자의 계기로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마주한 이들은 삶과 인물을 대하는 대만 감독들의 연출론부터 미학적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대만 뉴웨이브 영화로부터 받은 다채로운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해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 지극히 지금, 여기의 현실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을 보는 것은 단순한 영화 보기가 아닌 다감각적 체험이다. 삶과 더 닮은 긴 영화적 호흡 속에서 우리는 내가 경험했던 혹은 경험하지 않았으나 그립고 쓰라린 어떤 기억을 마주한다. ‘좋은’ 영화란 그런 것이리라. 영화가 보는 이를 초대하고, 느리더라도 기어이 어떤 대화가 일어나 영화를 보는 이들이 함께 영화를 끝맺는 공동의 체험이 되는 것.” 이번 특집 기사를 위해 <씨네21> 앞으로 코멘트를 보내온 김보라 감독의 말은 우리가 지금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를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