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시간은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비옥한 토지"
2020-09-08
글 : 김성훈
<테넷> 촬영현장의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왼쪽부터).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전세계 영화인들이 만들고 있는 어떤 영화든 사람들이 그걸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개봉까지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서일까.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테넷>을 공개한 뒤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테넷>이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흥분된다”고 기뻐했다. <테넷>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통해 비선형적 스토리, 아날로그적 스펙터클, 가족 등 자신의 인장을 아로새기고 변주해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다. 이 영화는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가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무리를 막는 스파이물로, 전세계에 개봉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관객 사이에서 ‘N차 관람’을 부르며 팬덤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 개봉 첫날인 지난 8월 26일, 그와 주고받은 긴 대화를 공개한다.

-<테넷>은 20년 전 당신이 연출한 영화 <메멘토>의 특정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출발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항상 시간 경험과 그것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고, 시간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복잡한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시간은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묘사할 수도,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여러 방법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카메라, 특히 필름 카메라는 시간을 볼 수 있고 포착할 수 있는데 그것은 100년 전 영화라는 매체가 처음 생겼을 때 보여준 근본적인 혁신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를 보는 방식과 시간과의 관계가 매혹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영화는 관객에게 시간을 묘사하는 메커니즘을 각각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은 대개 감추어져 있다. 나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묘사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함께 토론하며,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롭다. <테넷>은 오랫동안 생각해온 특정 이미지와 컨셉들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벽에서 총알이 튀어나오면서 두개의 타임라인이 교차하는 이미지다. 그것은 20년 전부터 이리저리 구상해온 이미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과학 원칙이 자리 잡고 있다. 물체가 관통되고, 사람들이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2014년에 대본을 본격적으로 작업했다. <메멘토>에서 총알이 역행하는 장면은 주인공 레너드의 시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은유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첩보 스릴러의 옷을 입혀 SF를 결합했다.

-전작을 통틀어 스파이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스파이 장르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나.

=스파이영화는 관객이 등장인물과 함께 모험에 나선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스릴이 있지 않나. 일상에서 보기 힘든 풍경들을 보고, 절대 갈 수 없는 공간들을 경험하는 게 스파이영화의 매력이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영화는 <007과 여왕>(1969)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릴 때부터 ‘007 시리즈’를 좋아했고, 특히 <007과 여왕>은 제임스 본드 영화의 좋은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는 대규모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화려하고 이국적인 전세계의 공간을 누비는 모험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테넷>에서도 그것을 담아내고 싶었다.

-전작 <인터스텔라>를 함께 작업한 이론 물리학자 킵손 박사는 언제 본격적으로 합류했나. 그의 합류가 <테넷> 시나리오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킵은 자신이 주도했던 <인터스텔라>가 진짜 과학을 기반으로 한 SF영화가 되길 원했다. <인터스텔라> 세트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테넷> 시나리오를 쓰다가 다소 상상이 과한 컨셉을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면 킵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요청했다. 킵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물리학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게 많은 영감을 준 든든한 조력자다.

-영화 속 인물이 과거로 이동한 결과를 보여주는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와 달리 <테넷>은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열역학 법칙에 충실한데.

=인버전의 과정이 스토리의 토대를 이루는 동시에스토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테넷>은 시간을 여행하는 영화가 아니다.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는 여행 과정이 시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핑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는 인버전에 물리학적인 한계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회전문을 언제, 어디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스토리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 영화의 특정한 규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데 세심하게 공을 들인 것도 그래서다.

-<테넷>은 새로운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기후 변화가 인류에 큰 위협이 될 거”라는 평소의 생각이 영화의 배경을 설정하는 데 얼마나 반영됐나.

=확실히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를 다룰 때 우리의 존재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게‘오늘’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 핵무기 경쟁 등을 소재로 한 007 영화가 1960년대에 제작됐을 때 핵의 위험성이 경고처럼 제기되지 않았나.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지구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우리 생활에 위협이 되는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해야 한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을 영화내내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콘이 된 영화 캐릭터 중에서 이름이 없는 캐릭터가 전통처럼 전해진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데리고 만든 ‘이름 없는 남자’(Man with No Name) 3부작(<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도 있고. 드라마 중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더 프리즈너>(1967)에서도 주인공이 이름이 없는데, 이 드라마는 <테넷>을 만드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테넷>에서 ‘주도자’를 통해 이루어내고 싶었던 건, 우리 영화의 심장 같은 아이콘적인 존재감을 만드는 것이었다. 캐릭터의 이름도, 살아온 배경도 특정하지 않은 시네마의 전통을 활용하되,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표현해낸 캐릭터에 관객의 생각을 투영하게 했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출연했던 코미디 드라마 <볼러스>를 인상적으로 보고 출연을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어떤 면모가 당신의 시선을 붙잡았나.

=그의 카리스마가 시선을 확 끌었다. 이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초대를 받아 칸국제영화제에 갔는데 칸에서 <블랙클랜스맨>을 보고 그가 주도자 역에 적임자임을 확신하고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고, 그걸 잘 묘사하고 부각시킨다.

-사토르와 그의 아내인 캣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건 무엇인가. 특히 당신의 전작에서 여성은 대체로 부재하거나 존재가 지워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캣은 그렇지 않아 눈에 띄었다.

=대본에서 사토르는 ‘차가운 눈에, 짧은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으로 묘사했다. 사토르는 무자비하고 이기적이며 지적인 데다가 난폭하다. 원초적인 본능이 강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한마디로 짐승 같은 존재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그가 성장기를 보낸 난폭한 환경이 작용한다. 캣은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로 아들 때문에 사토르와 끔찍하게 얽혀 있다. 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로, 극도로 영리하고 직관적이며 매우 건조한 ‘교수대 유머’(gallows humor) 감각을 갖춘 인물이다.

-주도자가 알고리즘을 되찾기 위해 인버전해서 고속도로로 다시 가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주도자가 과거의 시간을 기다리는 장면은 인버전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였다.

=자동차 추격 신은 같은 인물들, 자동차들, 사건들이 거꾸로 갈 때 또 등장하므로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어떤 타임라인에 적용해도 그 사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들어맞았고, 일치해야 할 타이밍 모두 정확하게 맞췄다.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마야(Maya)를 활용해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계산했고, 수정을 거쳐 두개의 타임라인을 정확하게 대칭시켰다. 다양한 기법을 연구했는데 카메라를 순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도 순방향으로 할 수 있고, 아니면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도 역방향으로 할 수 있다. 혹은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순방향으로 할 수 있고, 카메라를 순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역방향으로 할 수 있다. 네 가지 방식으로 구분해서 찍은 이유는 시퀀스마다 강조하고 싶은 효과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화 속 시간은 서사에서 여러 역할들을 한다. 공간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이야기를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나.

=시간은 모든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내 영화에서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메커니즘을 스토리텔링에서 당연시하지 않고, 그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관객이 시간의 역할을 탐색하고, 어떤 식으로 액션이 보여지며, 그게 어떻게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이야기가 전달되는지 고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테넷>에서 주도자가 노르웨이 프리포트에서 미래에서 온 자신을 마주한 기억을 떠올렸듯이, <메멘토>에서 레너드가 과거 아내와 있었던 기억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듯이, 당신의 영화 속 시간은 인물이 기억을 떠올리거나 기억을 왜곡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시간과 기억은 어떤 연관성이 있나.

=내가 만든 영화들 중에는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가 도드라지는 영화들이 있다. 언급해준 <메멘토>가 그 관계를 다룬 첫 영화였고, <인셉션>도 그렇지만 구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테넷>을 통해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었다. 시간이 우리 존재의 토대이고 그래서 분석,설명, 이해가 힘들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기에 비옥한 토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테넷>에 핵의 위험성과 기후 위기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인터스텔라>에서도 기후 위기를 다뤘는데 영화에서 만 박사가 “우리는 잘 돌보면서 후손들이 처할 문제에는 공감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나. 윤리적 측면에서 이 질문에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계속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행성을 놓고 후손들과 갈등을 빚는 세대의 이야기.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점점 이해도가 높아지는 문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전세계 영화산업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 광경을 어떻게 보고 있나.

=공동체적 스토리텔링의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이든 1980년대의 홈비디오든, 오늘날의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이든 극장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매체들은 나중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인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나. 큰 극장 스크린이 됐건, 작은 화면이 됐건 영화라는 매체는 앞으로도 발전하고 진화할 것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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