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상상하는, 트랜스젠더 여성과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
2020-09-09
글 : 김경태 (퀴어문화연구자)
유토피아 상속을 기획함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19)에서 가장 낯선 풍경을 꼽으라면, 아마도 트랜스젠더 여성 유이(박정민)와 살인청부업자 인남(황정민)의 9살짜리 딸 유민(박소이)이 단둘이서 파나마 해변에 당도하는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그에 앞서 펼쳐진 화려한 액션 장면들이 선사하는 익숙한 쾌감과 비교할 때, 트랜스젠더 여성과 어린아이가 ‘가족’이 되어 이국 땅에 정착하는 결말은 정적이지만 강렬한 정서적 체험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관계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자궁이 없기에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양육/훈육하는 데 있어서도 부적합한 신체를 가진 것- 모유 수유가 불가능한 인공가슴에서부터 비규범적인 성 정체성까지– 으로 각인되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랜스젠더 여성과 아이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자신과 용기가 있을까?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트랜스젠더 여성과 아이의 양립 불가능을 목격한 바가 있다.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은 홀로 남겨진 ‘코피노’ 소년 민호를 돌보고 있다. 일을 나가야 할 시간이 되자, 위층에 사는 트랜스젠더 여성 티나(안아주)에게 민호를 잠시 돌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술이 덜 깬 채 일어난 티나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싫어, 나 애 볼 줄 몰라”라고 단박에 거절하며 담배 하나를 꺼내 든다. 뒤이어 재일교포 야쿠자가 속옷 바람으로 방문을 열며 그녀를 찾는다. 티나를 둘러싼 모든 정보들은 일제히 그녀의 생활 방식이 아이를 돌보기에 얼마나 부적합한지에 대한 각주가 된다.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이태원이라는 지역이 표상하는 다양성과 성적 개방성의 상징적 존재처럼 다뤄져왔다. 그들은 트랜스젠더 클럽의 ‘유흥하는 신체’로 현재의 쾌락을 위해 이태원의 밤 문화를 책임진다. 현재를 탕진하는 그들과 미래를 향해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은 그 어디에서도 접점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성전환 수술은 재생산이 불가능한 몸이 되는 것이므로 아이에 기반한 미래를 기약할 수조차 없다. 트랜스젠더 여성과 아이의 존재론적 간극은 한없이 넓어 보인다.

<꿈의 제인> <하프> <무게>…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2016)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제인(구교환)은 ‘엄마’를 자처하며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을 돌본다. 그중 왼쪽 새끼발가락이 없는 소현(이민지)에게, “나도 그런 게 있어. 내가 아무리 없다고 해도 사람들 눈에 보이니까. 내가 거짓말하게 되는, 그런 ‘쏘 스페셜’한 게 붙어 있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그대로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편견의 시선으로 그들의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의 서사를 현재화한다. 그들의 미래를 궁금해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체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기 바쁘다.

특히, 김세연 감독의 <하프>(2014)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불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전면화한다.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인 민아(안용준)가 남자 교도소에 갇혔을 때, 남성 재소자들에게 그의 페니스는 비가시화된다. 그 신체적으로 불완전한 여성은 남성들에게 여성의 공백을 메워줄 대체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위해 그녀의 페니스는 일시적으로 지워진다. 그녀는 여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부재한 공간에서 남성의 욕구를 해소해줄 유사-여성으로 대용될 뿐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그녀는 여성 교도소로 이송된다. 그런데 여성 재소자들에게는 그가 아무리 여성적인 외모를 가졌어도, 페니스가 달린 한 부재한 남성의 대체자가 될 수 있다. 그때, 그 여성들에게 그의 페니스는 그의 외모를 압도할 만큼 과잉-가시화된다. 그녀는 성별 이분법 아래에서 타자의 욕망에 따라 남성과 여성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며 고정된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

심지어, 전규환 감독의 <무게>(2012)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동배(박지아)에게는 트랜스젠더 혐오가 내재화되어 있다. 차마 페니스를 잘라낼 수 없는 이유는, 그 거세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의 성기가 타고난 여성의 성기와 본질적으로 같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배는 자신의 페니스를 부여잡고 “이것이 있는 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벌레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페니스를 잘라낼 수는 있지만 잘라낸 흔적까지 지워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배는 페니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해주고 구애하는 모든 남성들을 내친다. 그녀는 수술을 통해 외적으로 완벽한 여성이 되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가 남자였던 과거는 결코 삭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남자였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런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실에서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여대 입학과 군복무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 역시, 그가 한때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적으로 완벽한 여자가 되더라도 페니스없는 남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결국 ‘한때 남자였던 여자’로 재명명될 뿐이다. 반면에, 그들의 미래를 상상해본 적은 드물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과거에 포획되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사회가 구상하는 미래의 장밋빛 노선은 규범적 정체성에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그 신체적 조건들과 이성애규범적시선들은 그들을 과거의 시간성에 결박시키며 그들이 미래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얼마나 진짜 여성에 가까운가의 여부에 대한 정체성 중심의 가치 판단은 과거를 지우라는 불가능한 요청을 지속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과거에 얽매이게 할 뿐이다. 그들은 현재에 있지만 여전히 과거를 산다.

이제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시간성에 갇힌 그들이 미래를 담보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돌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가장 윤리적인 저항이다. 이때, 뜻밖에도 아이는 그들에게 부재하거나 결핍된 미래를 선물한다. 미래는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민호를 아끼는 소영에게 차츰 동화된 티나는 뒤늦게 자신이 돌보겠다며 손을 내민다. 그러자 민호는 움찔하며 그 손길을 피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도훈(윤계상)이 “애 눈은 못 속인다니까”라고 웃으며 티나를 놀린다. 민호는 그녀가 트랜스젠더라서 피한 게 아니라 앞서 자신을 돌봐달라던 소영의 부탁을 거절했던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사람을 거짓 없이 대할 줄 안다. 우리는 편견없는 아이의 시선을 경유해야 한다. 아이에게는 그녀의 성 정체성과 과거가 중요하지 않다. 진심을 가지고 살갑게 손을 내밀면 아이는 마음의 문을 연다. 다시, 미래는 아이의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미래는 그들을 돌봐주는 어른의 손길에 달려있다.

<꿈의 제인>에서 제인은 아이들에게 돈을 벌고 일을 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는 건 아이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서로를 돌보고 함께 즐기며 사는 법을 가르친다. 그녀는 업소에서 ‘미러볼’을 훔쳐와 집 천장에 단다. 현란한 불빛을 반사하며 돌아가는 미러볼 아래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그렇게 트랜스젠더 여성의 유흥하는 신체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놀이의 가치와 비로소 공명한다. 삶을 무턱대고 긍정하지 않으며 죽음을 애달프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삶은본질적으로 행복하지 않다며 염세적인 시각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대신, 그 불행한 삶에서 행복의 횟수를 한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애쓰면 된다고 위로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단순히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로 돌아가보자. 미래 없이 살아왔던 인남에게 있어, 유괴된 딸의 안전한 구출은 생존의 유일한 목표가 된다. 딸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아이야말로 허무하고 막막했던 자신의 미래를 밝게 대리할 수 있다. 형의 복수를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하는 레이(이정재)와 함께 자폭하면서, 그는 유일하게 신뢰하는 인물인 유이에게 딸을 맡긴다. 유이는 완전한 여자가 되기 위해 한국에 있는 어린 아들을 포기하고 타이에 왔다. 그녀가 딸을 찾는 인남의 조력자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수술비라는 금전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부(모)성애에 대한 공감이 자리 잡고있었다.

가족의 가치를 재사유하기

<하프>

인남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아이/미래를 지켜내고 유이는 그가 맡긴 아이/미래를 돌본다. 마초적인 이성애자 남성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정체성과 양립할 수 없던 부모의 자리뿐만 아니라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를 물려준다. 교차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들은 아이/미래를 위해 보기 드문 연대를 실천한다. 인남은 유이를 트랜스젠더 여성이기 이전에 돌봄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인정한 것이다. 비록 그들이 온갖 난관이 예상되는 한국이 아니라 파나마에 정착하는 설정을 통해 현실적 층위에서 조금 비껴가지만, 동시대 한국의 상업영화가 상상할 수 있는 트랜스젠더 재현의 최전선으로 유의미하다.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미래를 선물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와 가까이할 수 없던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이를 구하고 돌본다. 그들이 더이상 과거에 갇혀 있지 않고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 때, 보다 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돌봄 행위는 모든 관계 맺기의 본질이다. 이제 그들에대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가치 평가는 얼마나 진짜 여성에 가까운지를 입증하는 정체성 투쟁이 아니라 돌봄을 수행하는 윤리적 저항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돌봄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기 위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는 가부장의 너그러운 이해심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의 주체로 상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 가족의 이성애규범적인 논리를 극복하는 첨병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스크린에 소환하는 것은 가족의 가치를 그 돌봄의 층위에서 재사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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