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내내 흐뭇하고 애잔했다. 문득 어린 시절 여름 저녁 골목길의 습한 냄새마저 떠오를 정도로 그리움이 차올랐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운 걸까. 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나는 2층 양옥집에서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나는 어떻게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그리워하는가. 영화에 듬뿍 담긴 향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한번 따라가보았다.
겪어보지 못한 기억을 추억한다는 것
여름, 그리고 밤. 따로 부를 땐 몰랐지만 연달아 입에 올리면 이상한 단어. 그 울림에는 꿈결 같은 애잔함이 깃들어 있다. 눈뜨면 사라질 하룻밤 환상 같은 시간. 들뜬 열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은 기억들. 어딘지 포근하고 그리운 작별 인사의 추억. 그 모든 흔적에는 한때 모두가 지나왔고,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상이 묻어난다. <남매의 여름밤>의 영어 제목은 <Moving on>이다. 영화 전반 내내 ‘남매의 여름밤’보다는 ‘(아마도 머물 곳을) 옮기다’라는 제목이 영화의 상태를 더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담백하게는 남매가 여름 동안 의도치 않게 이사를 하게 된 사연이다. 터전을 옮기는 과정을 적은 일기이자 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변화에 대한 고백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람만큼 집이 중요한, 공간에 얽힌 기억에 대한 영화이기에 ‘이동한다/머문다’라는 키워드가 내내 중요하게 작동한다. 당연히 카메라의 위치나 앵글도 거기에 충실하다. 그러다 최후에 이르러서야 <남매의 여름밤>이란 표현이 썩 어울리는,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납득할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추억이 당신을 그리워할 때
옥주(최정운)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넋이 빠진 것마냥 멍하니 앉아 있다. 문득 동생 동주(박승준)가 엄마는 오지 않느냐고 묻자 옥주는 엄마가 여기를 왜 오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다음 컷에 엄마가 찾아온다. 나는 이 연결이 꽤 재미있다고 느꼈다. <남매의 여름밤> 전반에 깔려 있는 태도인데, 편집으로 괜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전의 장면과 조응하는 장면을 배치한다. <남매의 여름밤>은 마치 숏 자체에 인격을 부여한 것마냥 거의 모든 연결이 숏끼리 서로 마주 보고 나누는 일종의 대화처럼 구성되어 있다. “엄마가 왜 와”란 대사 뒤에 엄마가 등장하고 “조용하고 진중하고 자기 가족 잘 챙기는 남자 만나라”는 고모의 조언 뒤엔 바로 노을녘 벤치로 이동하여 마음에 둔 남자 친구를 만난다. 비단 서사적인 차원뿐 아니다. 집 안쪽에서 앵글을 한번 잡으면 (설사 중간에 시간의 점프가 있더라도) 반드시 반대 방향에서 다음 앵글을 시작한다. 그렇게 모든 숏이 서로를 마주 보며 화답하는, 공간의 대화처럼 구성되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는 이러한 톤을 깨고 갑자기 침범하듯 정면 숏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밥이나 먹고 가라는 의례적인 인사 후 카메라가 갑자기 동생, 아빠, 고모 그리고 옥주 순으로 할아버지 영정사진을 등지고 밥을 먹는 장면을 정면에서 잡는 것이다. 매우 이상한 숏이라고 의문을 가질 찰나, 할아버지의 영정을 배경으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식구들을 잡은 롱숏이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연결은 카메라의 시선, 말하자면 화자의 존재를 드러낸다. 지금 이 가족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윤단비 감독은 복잡하게 꼬지 않고 이런 기묘한 숏의 원인을 ‘옥주의 꿈’이라고 바로 답한다. 심지어 앞쪽에 고모의 입을 빌려 꽤 친절한 설명도 깔아두었다. 상영시간의 중간, 영화의 허리가 꺾일 즈음 옥주와 고모는 방충망 안쪽에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카메라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젊을 적 결혼사진을 슬쩍 보여준 뒤 고모의 꿈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갓난아기일 때 할머니가 나를 안고 횡단보도를 막 뛰어갔어. 진짜 생생했거든. 어렸을 땐 그게 내 기억인 줄 알았어. 근데 생각해봐라? 포대기에 싸인 내가 보이는 거면 그건 기억이 아니라 꿈인 거잖아.”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이야기에서 화자의 시점 혹은 위치는 영화라는 세계를 창조하는 출발점이다. 개별 장면으로 놓고 보자면 세계를 그린 소실점이라고 해도 좋겠다. 영화에선 대개 은폐된 3인칭 객관묘사를 통해 리얼리티를 부여하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공공연하게 화자(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주관의 세계를 구축한다. 사실 여기서 카메라가 1인칭인지 3인칭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시점의 이동이 언제 발생하는가, 그리고 그 이동이 얼마나 자의적인가에 달렸다. 시점을 이동시키는 방식이야말로 창작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결정짓는다. 윤단비 감독은 카메라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기억과 꿈을 구분한다. 장례식장 시퀀스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건 거꾸로 그전까지 모든 숏들이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카메라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형태를 고정시키는 종류의 영화다. 영화는 카메라를 고정시켜 공간이, 장소가 그들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그러다 말미에 이르러 문득 기억과 꿈의 차이에 대해서 논한다.
시선의 문제는 결국 엔딩으로 연결된다. 집으로 돌아온 옥주네 가족은 이제 할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식사를 한다. 이때 할아버지의 빈 소파를 잡아주는 시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옥주의 것, 가족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제 사라진 주인을 그리는 2층 양옥집의 시선처럼 보인다. 포대에 안긴 자신을 보았다는 고모의 꿈처럼, 주인을 떠나보낸 집은 이제 그 빈자리를 응시한다. 밤새 오열하던 옥주의 실루엣은 다음날 아침, 잠을 자고 있는 옥주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한참 잠이 든 옥주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이제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들을 연결시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 이층 계단에 비치는 햇살, 청명한 날씨의 빨랫줄, 토마토를 키우던 할아버지가 늘 앉아있던 마당의 의자까지 카메라는 집의 기억들을 찍는다. 이것은 옥주의 꿈인가. 아니면 집이 꾸는 꿈일까. 장례식장 시퀀스를 이미 목격한 관객은 이제 어디까지가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알 길이 없다. 사실 윤단비 감독은 이제 그런 구분이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며 넌지시 감정 한가운데로 관객을 안내한다. <남매의 여름밤> 전반에 깔린 추억과 그리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여름밤에 대한 뭉근한 감성 안으로 모든 요소들을 포섭한다.
영화적 레퍼런스를 향한 향수
이상한 건 누가,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주체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후반부 꿈을 통한 시점의 이동을 거치며 기억과 추억의 윤곽이 흐려진다. 분명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감각은 남아 있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워하는지가 불분명하다. 이는 <벌새>를 비롯해 근래 한국 독립영화 중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몇몇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유하자면 겪어본 적 없는 무언가를 향한 노스탤지어라고 해도 좋겠다. 이건 물리적으로 연출자가 그 시절을 실제로 겪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아니다. 가령 <벌새>의 경우 감독의 실제 유년 시절 경험담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고, <남매의 여름밤>에도 그와 같은 흔적은 곳곳에서 묻어난다. 다만 그 기억들을 반영하는 형태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안전한 방식, 그러니까 추억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경 평론가는 <벌새>의 엔딩을 두고 “자기 연민과 극복의 감상주의”(<필로> 2019년 10호 ‘<벌새> 그 소녀의 은유법’ )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과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대신 시대적 감수성 혹은 추억이란 이름의 회상으로 뭉뚱그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독립영화감독들이 자신들의 영화적 고향을 오즈 야스지로나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에서 발견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시대적 단절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젊은 감독들에겐 근접한 시기의 한국영화들보다 좀더 먼, 어쩌면 본인들의 유년기를 함께 거쳐왔을 영화들이 자양분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그럴 수 있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50년대 오즈 야스지로와 80년대 대만 뉴웨이브로 돌아가는 건 어딘지 안전 지향의 도피적인 기운이 감지되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노스탤지어란 얼핏 과거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언어다. 현재의 결핍을 인지하고 과거로부터 그것을 발견해 회복하려는 태도인 셈이다. 하지만 <벌새> <남매의 여름밤> 등 일련의 영화에선 ‘그리움’이라는 핵심 정서만 취하고 구체성을 지워버린다. 오해해서 안되는 건 로케이션, 미술 등 시대고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남매의 여름밤>의 아름다운 노을이 주는 아스라하고 애틋한 분위기가 문제다. 가령 옥주가 할아버지의 집을 팔아버리려는 아버지의 부도덕함에 분노하고 집을 뛰쳐나간 뒤, 자신이 아빠 몰래 훔쳐서 남자 친구에게 건넸던 신발이 부끄러워져 다시 뺏어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조차 해질녘 골목길 노을이 아름답게 옥주를 감싼다. 그 시절은 진정 아름답고 무해했었나.
지나간 것을 애잔하게 포장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다. 그리고 기억과 추억의 태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는 결국 구체성이다. 주체가 설정되지 않은 공간은 추억이라는 보편타당한 감성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하지만 장소는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 성립한다. 최근 한국 독립영화들이 시대를 얼마나 정확하게 제대로 응시하고 있는가를 자문해보면 답은 분명하다. <남매의 여름밤>의 시공간은 모호하다. 인천 어딘가의 양옥집, 누군가는 언젠가 보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노스탤지어를 주제로 한 일종의 테마파크처럼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여기에는 언젠가의 인천이라는 장소가 없고 대신 대만 뉴웨이브 영화 속에서 접했던 익숙한 공간들이 자리한다. 꾸며진 풍경을 전시하는 익명의 공간. 혹은 재현 위의 재현. <남매의 여름밤>이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이나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비교해보면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가령 에드워드 양의 영화가 특별한 건 그가 직접 겪고 버텨낸 시대성이 정면으로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반영이나 투사와는 다르다.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는 본인의 의식 바깥에서 본인도 의도하지 않은 순간들까지 포착되어 있다. 이것은 재현이 아니라 포착이다. 포착을 위해서는 ‘거기에 있는 것’을 찍을 필요가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이 우연히 와서 찍힌다’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영화로는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자각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렇게 포착된 지극히 평범한 장면들은 연출자의 의식 바깥에서 시대를 포착한다. 반면 <남매의 여름밤>이 재현하는 것은 구체적인 시공간이 아니라 감독의 의식으로 구축된 추억이다. 다른 말로 스스로를 3인칭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정서가 아닌 형식으로서의 노스탤지어, 그 탐미적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나면 <남매의 여름밤>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우리는 추억으로 포장된 재현의 전능함 앞에서 의심을 해야한다. 감성이란 이름의 강한 빛에 눈이 멀어 많은 것들이 가리고 지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매의 여름밤>이 전하는 정서들까지 진실을 가리는 의도된 은폐로 폄하하고 싶진 않다. 고모가 말했던 것처럼 꿈은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그저 솔직한 욕망의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냥 엄마를 보고 싶으니까 엄마를 보고, 함께 있는 식구가 보고 싶으니까 한번 그려보는 가상의 구현. 적어도 <남매의 여름밤>은 꿈을 현실인 양 포장하진 않는다. 그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애잔함을 도구 삼아 꿈결 같은 아련한 정서를 복구할 따름이다. 이것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스타일만 모방한 오독인가. 아니면 그 감각들을 하나의 경험으로 체화한 뒤 다시 뽑아낸 재창작인가. <남매의 여름밤>에 대한 평가는 이 지점에서 갈릴 것이다.
물론 <남매의 여름밤>은 연출자가 겪은 실재(Real)의 반영, 시대의 재현이 아니다. 영화적 레퍼런스들 위에 서서, 재현된 것들을 또 한번 재현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생산해내는 감정들이 실제(Reality)가 아닐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레퍼런스 위에서 재생산을 반복하고있는 영화들을 알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어느덧 고색창연해진 말이지만 이미 우리 체험의 상당 부분은 시뮬라크르를 기반으로 한다. <남매의 여름밤>이 전달하는 노스탤지어는 이젠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정서들 위에 서 있고, 급기야 정서적 공감대라는 촉매를 거쳐 원본이 되는 영화들마저 현재형으로 되살려놓는다.
대만 뉴웨이브 영화가 여전히 재상영되며 관객과 만나는 작금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영화적 현재들이다. 최근 젊은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적 토대를 50년대 일본영화나 80년대 대만 뉴웨이브로 설정했다면 그 선택 또한 지금 우리 시대의 무의식을 더듬어볼 수 있는 하나의 실재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확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남매의 여름밤>을 비롯한 일련의 영화들의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매의 여름밤>과 <벌새>는 어떻게 닮았고 무엇이 다른가. 거제도를 배경으로 강한 지역색을 드러내는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과 인천을 무대로 한 <남매의 여름밤>은 왜 서로 다른 길을 걷는가. OTT를 중심으로 지정학적 조건은 물론 시대마저 뛰어넘어 동시적으로 섞이고 있는 오늘날, 80년대 대만 뉴웨이브와 같은 내셔널 시네마는 여전히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 답이 아닌 질문을 바라는 글이다. 우리는 일련의 영화들이 던질 변화의 파장을 응시해야 한다. 이 짧은 글에서 모두 소화할 순 없겠지만 제일 처음에 꺼낸 질문 한 가지만큼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남매의 여름밤>의 노스탤지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 향수병은 이야기의 결과물도, 재현된 공간의 유사함도 아니다. 차라리 형식적인 모방에 가깝다. <남매의 여름밤>이 모사하는 건 이들 영화가 발견했던 영화언어 그 자체다. 예컨대 클로즈업을 배제한 인물의 풀숏, 인물이 사라진 뒤에도 잠시 공간을 응시하고 기다려주는 지연된 편집 등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에서 익히 봐왔던 보편적인 형식이다. 개다리춤 한번으로 휴대폰을 약속받은 동생이 질투난 옥주가 이를 닦는 뒷모습을 욕실 문까지 하나의 프레임으로 설정하고 잡아주는 것. 표정보다는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를 통해 더 정확하게 전달되는 감정들이 있다. 인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둔 카메라는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공간의 시점에서 거꾸로 인물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남매의 여름밤>의 진짜 주인공이자 화자는 옥주가 아니라 2층 양옥집이다. 옥주의 꿈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이 영화는 철저히 2층 양옥집의 시점에서 상황을 바라본다. 남매가 처음 집에 들어서던 날, 카메라는 집 안쪽에서 현관을 바라보며 손님을 맞이한다. 반면 할아버지가 병원에 다녀올 땐 대문에서 현관을 바라보는 쪽으로, 그러니까 식구를 맞이하는 방향에 카메라가 위치한다. 남매가 2층 양옥집의 가족이 되는 순간은 어떤 사건을 거쳐서가 아니다. 카메라가 집 안쪽에 틀어 박혀서 남매를 관찰하는 대신 할아버지처럼 안으로 품어줄때 비로소 가족이 된다. 말 한마디 없던 할아버지가 신중현의 <미련>을 듣고 있던 밤. 아빠와 고모로부터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밤. 희미한 음악 소리에 잠을 깬 옥주가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때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메라가 할아버지를 보는 옥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옥주를 보는 이는 누구인가.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있는 할아버지는 옥주를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보는 옥주를 정면에서 마주 보는 건 2층 양옥집이다. 아니 2층 양옥집의 육신을 빌린, 과거를 탐미하는 노스탤지어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던 옥주는 계단 중간에 걸터앉아, 할아버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음악을 듣는다. 서로를 마주 보고 응시하던 과거와 현재가 어느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정서)을공유하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남매의 여름밤>이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화답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