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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하지 마세요' 정연경 감독 - 힘든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하여
2020-09-17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괜찮아, 어차피 다 시들어버릴 텐데 뭐.” 정국(최로운)에게 꽃을 꺾어 선물하며 내일은 엄마랑 놀러 갈 거라고 말하는 선유(조서연). 그 말에 드리운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일까. 다음날 선유가 학교에 나오지 않자 정국은 불안한 마음에 직접 선유를 찾아 나선다. 정연경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사업 실패로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와 단둘이 남겨진 선유의 세계를 묘사한다. 같은 반 친구 정국은 미묘하게 겉도는 선유의 곁을 지키며 특유의 발랄함으로 슬며시 선유를 웃게 만든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201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캐치에서 극영화 부문 대상인 메가박스상을 수상했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본선 진출작으로 선정되며 일찍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작품이다. 정연경 감독은 정국이 선유에게 그랬듯, “영화를 통해 힘든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녀 살해 후 자살'사건을 영화로 풀어내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막상 시나리오를 쓰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내보낼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오히려 상을 타고 난 뒤 앓아누웠다. 주변에서 이런 사건을 본 적도, 도움을 준 적도 없는 내가 이 주제를 다뤄도 되나 싶어 덜컥 겁이 나더라. 그때 자문을 준 교수님의 말이 큰 도움이 됐다. “이미 이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제야 ‘아, 나는 이미 발걸음을 뗐구나’하고 깨달았고, 그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영화를 보며 마음 아픈 순간들이 많았는데 특히 선유가 멀리서 아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그랬다. 극도로 두려워하는 선유의 감정이 잘 드러난 신이었다.

=아이가 이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는 순간을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지 고민이 됐다. 관객이 선유의 심정을 잘 따라가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유의 클로즈업 신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확실히 그 장면 이후로 선유에게 더 몰입이 됐다. 아빠가 선물로 준 종이접기 책을 엄마가 라면 받침대로 쓰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화낼 법도 한데 선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엄마 앞에선 어떻게든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한 사람의 자살은 뒤에 남은 유가족에게 자살의 문을 열어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자살자 유가족의 상처가 크고 깊다는 건데 유독 우리나라에선 이에 관한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를 찍을 때 선유와 엄마에게 좀더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이미 아빠를 잃은 선유는 혹시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불안해하고 항상 엄마의 감정을 살핀다. 그러다보니 엄마에게 함부로 화를 내지 못하는 거다. 촬영하면서도 굉장히 안타까웠던 장면이다.

-선유는 정국이랑 있을 때 가장 편해 보이더라. 감정 표현도 확실히 하고. 정국이도 그런 선유의 변화를 세심하게 알아채는 친구다.

=정국이라는 인물을 구상하면서 내가 힘들 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봤는데, 내 아들이 떠오르더라.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는 가장 가깝고 편한 존재다. 선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고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국이는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선유의 특별함을 없애준다. 다 같이 초콜릿을 나눠먹는 신에서처럼, 정국이는 선유가 자연스레 아이들과 섞일 수 있도록 돕는다. 실상 정국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다.

-그런 정국이와 어른들의 대비도 눈에 띄었다. 가령 선생님과 슈퍼마켓 아주머니도 선유를 돕고자 하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이런 선한 마음에도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짧은 도움의 손길조차 없었다면 선유는 훨씬 더 일찍부터 희망을 잃지 않았을까. 또 관객이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선유 역의 조서연, 정국 역의 최로운은 어떻게 섭외했나.

=선유의 경우 연기는 연기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였으면 했는데, 서연이가 딱 그런 배우였다. 실제로 컷 하면 바로 춤추고 까불고. (웃음) 좋은 의미로 깊게 몰입하지 않는, 밝고 건강한 배우였다. 반대로 정국이는 발랄한 친구를 섭외하려 했다. 그런데 최로운 배우는 실제로 만나보니 굉장히 듬직하고 어른스럽더라. 정국이의 장난기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연기를 정말 잘했다. 서연이는 나를 유일하게 울렸고, 로운이는 나를 유일하게 웃긴 배우여서 이 둘을 섭외하는 건 나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선유가 쓴 시 <나를 구하지 마세요>에선 제목과 달리 생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때문에 이 시가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것도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초고를 쓸 때 자연스럽게 시가 써졌고 거의 동시적으로 제목으로 설정했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선유를 두고 관객들이 '정말 그럴까?' 하고 의문을 갖고 영화를 들여다봐줬으면 했다. 그러면 표면적인 뜻만 받아들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선유의 진심을 관객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 마음을 헤아린 정국이가 결국 선유를 찾아 나선다. 개인적으로 선유가 자신을 찾아온 정국이를 뒤돌아보며 우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 만약 이들을 붙잡아주는 목소리가 먼저 가닿았다면,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전하는 영화를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봐주면 좋겠다.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영화가 예방주사의 역할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고등학생 때까지 영화에 관심이 없었고, 학부 때도 경영학을 전공했다. 어떻게 감독의 꿈을 꾸게 됐나.

=‘영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수강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과제로 ‘당신이 뱉은 껌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라는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크게 호평받았다. 사람들 앞에서 내 영화가 상영되던 순간의 두근거림, ‘훌륭한 감독이 되라’는 교수님의 격려가 감독의 꿈을 키우는 데 크게 작용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전작 <바다를 건너온 엄마>에선 해외로 일하러 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와 아이를 두고 한국에 일하러 온 재중동포 여성의 관계를 그린다. 전작과 <나를 구하지 마세요> 둘 다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를 다뤘다는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다를 건너온 엄마>는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대학생 때 엄마가 일본으로 일하러 가셨는데, 우리를 위해 엄마를 희생시킨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후에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한 조선족 여성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때 엄마 생각이 많이 나더라. 이러한 나의 경험들, 상처들을 엮어 <바다를 건너온 엄마>를 제작했다. 후에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영화를 보고 위안이 됐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위로를 받고 내 상처도 조금씩 치유가 됐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영화,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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