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뛰어났던 한국영화와 대만 뉴웨이브의 접점을 모색해보는 특집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벌새>의 김보라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을 레퍼런스로 꼽기도 했던 김보라 감독은 이번엔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지난 대만 여행을 추억하는 답신을 전해주었다. 2005년 8월 내한한 허우샤오시엔이 마스터클래스에서 펼친 이야기의 한 대목을 짚어낸 그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 일어나는 "공동의 체험"에 대해 곰곰히 더듬어나간다.
“열네살, 카오슝에 살던 때다. 점심을 먹고 나면 걸어서 높은 관리들이 사는 관저로 갔다. 높은 담을 넘어 망고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훔쳤다. 우선 배불리 먹고 나서, 열매를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담 위에서 먹으면서 사람들이 오지는 않는지 뒷길로 누가 다니지는 않는지 신경이 쓰였다. 망고를 먹긴 먹는데, 이제 바람이 불 것이고 매미가 울 것인데 그 소리는 과연 들릴까. 그런 신경을 쓴다는 게 하나의 영화가 아닐까. 영화란 건 하나의 주어진 상황, 분위기, 정서를 확대시키고 응집시키는 것이 아닐까.” - 허우 샤오시엔 -
타이베이 도시의 회색빛 낡은 빌딩, 그 빌딩 사이를 가르는 오토바이들의 소리와 매연, 일렁이는 햇볕, 나무들의 초록, 그리고 열기. 허우 샤우시엔,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뉴웨이브 영화들은 내게 장소와 앰비언트 음향이 어우러진 정서로서 기억된다. 그 확대되고 응집된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영화 속 공간을 함께 경험하고 호흡한다. 마치 내가 살았던 도시처럼. 대만에 가게 되었을 때 <애정 만세>에서 메이가 울며 거닐던 살림 공원, <하나 그리고 둘>의 팅팅과 패티가 만나던 용캉제의 육교, <비정 성시>의 지우펀을 갔다. 영화를 통해 내가 ‘살았던’ 그 도시를 온몸으로 다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을 보는 것은 단순한 영화 보기가 아닌 다 감각적 체험이다. 삶과 더 닮은 긴 영화적 호흡 속에서 우리는 내가 경험했던 혹은 경험하지 않았으나 그립고 쓰라린 어떤 기억을 마주한다. ‘좋은’ 영화란 그런 것이리라. 영화가 보는 이를 초대하고, 느리더라도 기어이 어떤 대화가 일어나, 영화를 보는 이들이 함께 영화를 끝맺는 공동의 체험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