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하워즈 엔드', 시대를 뛰어넘는 영화란 무엇인가
2020-09-22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왜 어떤 영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회자되고, 다른 영화는 그렇지 않을까. <하워즈 엔드>를 보면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중간의 기원

코로나19로 개봉작이 줄면서 재개봉작과 뒤늦은 개봉작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 몇몇 작품의 개봉은 관객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뤄졌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2011)와 <워터 릴리스>(2007)의 뒤늦은 개봉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후 감독을 향한 관심을 반영한다. 때로는 감독이나 배우가, 때로는 계절이나 영화를 둘러싼 상황이 특정 작품을 소환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하워즈 엔드>(1992)의 재개봉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각색자인 제임스 아이보리의 전작으로 주목이 이어진 결과다. 앞서 개봉한 <모리스>(1987)가 동성의 사랑을 다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분명한 연결점 속에서 부각되었다면, <하워즈 엔드>의 개봉은 <전망 좋은 방>(1985)에 이어 E. M. 포스터 소설 원작 영화 3부작의 재개봉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으로 지금 이 작품을 보아야 할 이유가 온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하워즈 엔드>의 개봉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지금 다시 보아야 할 이유를 특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셀린 시아마의 작품이 여성, 퀴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오늘의 관객에게 소구할 만한 연속적인 매력을 가졌다면,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를 관통하는 요소인 클래식한 시대극은 보편적인 매력 요소로 분석하기에는 애매하다. <하워즈 엔드>는 충분히 고전적이지 않으며, 당대의 새로움을 개척한 부류도 아니다. 영화에 묘사된 시대상은 분명 오늘날에도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상류층과 하층민 사이의 뚜렷한 계급 격차, 런던을 중심으로 단독주택에서 아파트 형태로 전환되는 주거형태의 변화, 위기에 처한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되는 경제 상황까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현실이 오늘날과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적 의미가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영화의 핵심에서 비껴난 것이다. <하워즈 엔드>는 어떤 현상에 관해 발언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안에 놓인 인물의 선택을 바라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한가운데

영화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건 역설적으로 그 안에 시간을 뛰어넘지 못한 무언가가 잠재되었을 때다. <하워즈 엔드>는 이에 관한 적절한 사례다. <하워즈 엔드>에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던 시절의 활기가 배어 있다. 이때 활기는 어떤 결말이나 목적을 향해 내달리는 선형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몇 가지 서사적 축을 잇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지체와 지연이 활기의 요인이다. 시간의 지체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전망 좋은 방>에서 피렌체의 한 호텔에서 루시(헬레나 본햄 카터)와 조지(줄리언 샌즈)가 만난다. 조지 부자가 루시 자매에게 전망 좋은 방을 양보하면서 시작된 인연은 불씨만 남긴 채 불발되지만, 이후 루시의 약혼자 세실(대니얼 데이 루이스)이 미술관에서 만난 조지 부자를 마을로 끌어들이면서 루시와 조지는 얼마간 시간을 두고 재회한다. 아이보리의 영화에서 인물이 이루는 삼각 구도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전망 좋은 방>에서 루시-조지-세실이 이룬 삼각관계는 <하워즈 엔드>에서 슐레겔-바스트-윌콕스 가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삼각 구도에는 늘 시간이 개입한다. 시간을 넘어 다시 연결되는 우연은 운명이라는 예감에 가닿는다. 제임스 아이보리의 삼각관계가 단지 축소된 사회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틈입으로 읽히는 이유다.

무언가를 잇는다는 것은 영화가 원작 소설인 E. M. 포스터의 작품으로부터 상속받은 고유한 성질이다. 주인공 마거릿(에마 톰슨)과 헬렌(헬레나 본햄 카터) 자매는 세대와 계급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상류층인 윌콕스 가문, 하층민인 바스트 가문과 각각 관계를 맺으며 두 계급 사이에 은폐되어 있던 관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자매가 레너드(새뮤얼 웨스트)를 돕는 과정은 위안과 불안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온다. 레너드는 잃어버린 우산을 찾기 위해 자매의 집을 방문한 데 이어 아내 재키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해명하기 위해 그곳을 다시 찾는다. 레너드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낭만적 야심’을 알아챈 자매는 그가 잠재성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영혼의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얼마간 돈이 필요함을 알고 있는 이들은 부유한 이웃인 헨리 윌콕스(앤서니 홉킨스)에게 청년의 사연을 알리며 그가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을 방안을 간구한다. 헨리는 레너드를 홍보하는 마거릿에게 정말로 낭만적인 것은 레너드를 보는 마거릿의 시선이라고 꼬집는다. 자매의 행위가 위안을 주는 이유는 레너드가 그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며, 불안의 이유는 그들이 레너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 결국 이들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쪽으로 손을 뻗는다.

자매는 단지 중간 계급이 아니라, 모든 중간자의 기원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중매하거나 부동산을 중개하는 일은 과거에는 사적인 영역이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은 대부분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자매는 시스템화되기 이전 호의로 작동했던 중간자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저지르게 된 잘못은 책임의 대상이기보다는 양심의 대상이다. 자매는 헨리 윌콕스에게서 얻은 정보를 레너드에게 전달하지만, 그 예측은 빗나간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레너드에게 돌아간다. 잘못된 중개자가 된 헬렌은 책임감과 미안함으로 괴로워하지만, 마거릿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자매의 엇갈린 태도는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중립적인 입장에 섰던 자매가 종국에는 각각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은 중립적인 중간지 대란 존재할 수 없음을 일깨운다. 오늘날 시스템화된 중간자들 역시 대부분 최상의 합의점을 찾는 이들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이득과 다른 이의 손해 사이의 저항을 줄이는 이들일 뿐이다.

운명처럼 예정된 사실은 하워즈 엔드가 결국 마거릿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미처 예측하지 못한 다른 운명은 레너드의 죽음이다. 자매의 행방을 찾아 하워즈 엔드에 당도한 레너드는 마침 그곳에 도착한 헨리의 장남 찰스의 칼을 피하다 책장에 깔려 죽고 만다. 이러한 결말은 하워즈 엔드가 마땅한 주인을 찾았다는 운명이 주는 안심과 누군가의 안타까운 죽음이 불러오는 허무함 사이에서 모순된 감정을 불러온다. 이러한 감정은 공평하지 못한 세상 속에서 가진 자가 감내해야 할 최소한의 고통인지 모른다.

시대극의 ‘창’이 보여주는 것

영화 제목과 동명인 저택, 하워즈 엔드는 영화의 다른 주인공이다. 집을 중심에 놓을 때, 히치콕의 <레베카>(1940)가 원형의 이야기로 떠오른다(이 역시 소설 원작 영화다). 두 작품은 공간에 밀착된 죽은 여인의 형상이 이야기를 작동하는 주된 장치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레베카>에서 죽은 레베카와 그녀의 자리를 대체하는 젊은 여성의 구도는 남성 중심적인 코드 속에 적대적 관계로 풀이되어왔다. <하워즈 엔드>에 이르러 레베카식 구도는 남성의 시선을 벗어나 두 여성 중심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표면상 마거릿은 헨리와 결합하며 죽은 루스(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에 앞서 루스는 유서를 통해 마거릿을 윌콕스 가문 안으로 깊숙이 초대한다. 시간의 차이를 두고 마거릿과 루스가 강하게 연결된 공간인 하워즈 엔드는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저택이기보다는 외딴곳에 위치한 낡고 평범한 저택이다. 누구나 동경할 만한 집이 아니라 특별한 인물의 눈이나 감각에만 포착되는 집이라는 점에서 하워즈 엔드는 욕망하는 자들의 소유물이 되는 대신 예민한 감각을 지닌 자를 위한 소박한 공간으로 남는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고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아 있는 나날>(1993)을 다음 작품으로 선택하며 다시 집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의 저택에서 일해온 집사 스티븐슨(앤서니 홉킨스)은 저택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킨 실질적인 주인이다. 스티븐슨을 비롯한 하인들은 그 자체로 집을 상징하며 집에 인격을 부여한다. <하워즈 엔드>에서 개인적이고 추상화되었던 집의 가치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세계정세를 놓고 토론하는 역사적인 장소로 변모한다. 두 저택 모두 당대 유행하는 흐름에서 비켜난 고집스러운 전통의 보루처럼 느껴진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깥으로 난 창문이다. 창은 건물의 안과 밖을 잇는 통로이자 외부를 향한 인물의 관심을 드러낸다. <전망 좋은 방>에서 피렌체를 방문한 루시가 숙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에머슨은 창밖의 풍경에 집착하는 루시에게 전망 좋은 자신과 아들의 방을 양보할 뜻을 내비치며 자신은 바깥에 관심이 없고 오직 내면을 바라볼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창밖을 내다보는 행위는 바깥을 향한 관심과 열린 시선을 드러낸다. 창문은 인물의 심리와 상황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모리스>에서 클라이브(휴 그랜트)는 모리스(제임스 윌비)가 남긴 여운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창을 닫는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 저택의 새로운 주인이 된 루이스(크리스토퍼 리브)는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듯 저택 안에 들어온 비둘기를 창밖으로 날려 보낸 후 창을 닫는다. <하워즈 엔드>의 마지막은 영화의 처음과 조응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하워즈 엔드 근처를 거니는 루스의 걸음을 따라 저택의 외부와 그 속의 사람들을 찬찬히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때문에 하워즈 엔드를 등지고 걸어 나오는 헨리와 마거릿에서 시작해 미래의 상속자에게로 향해가는 마지막 부감숏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영혼의 시선과 그 소유자로서의 루스를 다시 소환한다.

인물이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행위에 지나지않지만, 시대극에서는 그 자체로 매혹하는 데가 있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2019)에서 자매들이 커다란 창가에 모여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은 유독 마음을 흔든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가는 잊어도 그들이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도처에 존재하는 작은 창들의 스펙터클에 잠식당하기 이전, 안팎을 연결하는 창문은 지금보다 막강한 힘을 지녔다. 스크린의 은유로서 창의 영화인 히치콕의 <이창>(1954)에서 창이 다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목격되는 장소였다면,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에서 창밖을 보는 장면은 때때로 어떤 목적에서 벗어난다. <하워즈 엔드>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숏은 그가 바라보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목적의 숏이 아니라, 그가 바깥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관계의 숏이다. 창을 통해 마거릿은 다정한 헨리와 루스 부부를 바라보고, 헬렌은 비를 맞은 채 집을 보고 서 있는 레너드를 발견한다. 이후 그들은 창문 밖의 인물에게로 다가가 관계를 맺는다.

창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 외에 현재 그곳에 존재하지않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장소다. 창문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끝나곤 하는 그의 영화는 영혼의 시선에 관객의 시선이 포함됨을 드러낸다. 그의 영화에서는 인물이 바라보는 대상보다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데, 그것은 우리가 시대극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실체이기도 하다. 관객이 특정 시대 혹은 그 안에 존재한 인물들과 완벽히 소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이 본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들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오직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들을 통해서만 그 풍경에 다가갈 수 있다. 창문은 관객과 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연결의 가능성을 투명하게 열어둔다.

예정된 이야기를 향해가는 영화의 운명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과 이스마일 머천트는 두 사람의 성을 딴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을 통해 1963년 <가장>부터 이스마일 머천트가 사망한 해에 발표된 <화이트 카운티스>(2005)까지 40여편의 작품을 제작해왔다. 이들이 제작한 작품은 대부분 원작이 있으며, 동시대의 이야기보다 앞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적 멜로드라마가 주를 이룬다. 대자본이 투입되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저예산영화라는 점도 특징이다. 첫 작품 <가장> 역시 소설이 원작인 영화인데, 원작 소설 작가인 루스 프라워 자브발라가 직접 각본가로 참여했으며 이후 지속해서 시나리오 작업을 담당하며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의 일원이 된다. <하워즈 엔드>의 영화화를 적극적으로 제안한 것도 바로 자브발라였다. E. M. 포스터의 작품을 비롯해 <유럽인들> <러브 템테이션> 등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주로 영화화했다.

<하워즈 엔드>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것은 음악의 과잉이다. 과잉된 음악은 영화의 뿌리인 멜로드라마의 인장으로 읽힌다. 하지만 <하워즈 엔드>에서 음악은 정조를 전달하는 형식적인 표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로 기능한다. 특히 루스가 마거릿에게 ‘하워즈 엔드를 보여주고싶다’고 말한 직후 장면은 급작스럽게 전환되며 음악이 별안간 난입한다. 음악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것을 총체적으로 암시하는 요소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라는 영화의 주제와 소통하는 음악은 때로는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극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레너드가 찰스로부터 공격당한 뒤 비참한 최후를 맞는 순간의 움직임은 웅장한 음악과 조응하며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편집된다. 이 때문에 관객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레너드에게 닥친 불행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영화는 이를 비극의 틀 속에 가두지 않는다. 비극적 사건이 잠식하지 못한 레너드의 정체성은 그가 무엇보다 걷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읽은 소설 속 인물처럼 그는 새벽이 올 때까지 북극성을 보며 밤새 걷는다. 마거릿은 이따금 터져나오는 그의 기행의 원인을 선조들의 부름에서 찾는다. 운명의 날에도 그는 어깨를 구부정하게 앞으로 말고는 하워즈 엔드를 향해 저벅저벅 걷는다. 마거릿의 분석을 신뢰한다면 하워즈 엔드를 향해간 레너드의 걸음 역시 어떤 운명적인 부름을 향해 스스로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을 향한 레너드의 걸음은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를 비롯해 시대에 빚진 소설 원작영화들의 숙명을 함축한다. 레너드의 걸음이 소설 속 인물의 행위를 따른 것이었듯, 영화는 원작의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따른다. 레너드의 걸음은 가난한 이의 숙명이자 자산이다. 그 걸음 속에 지체와 지연으로서의 아이보리 영화의 특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워즈 엔드>가 시대를 뛰어넘는 영화인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하워즈 엔드>가 시대를 뛰어넘는 영화일 수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지연함으로써 지속하는 걸음이 그 안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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