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 1986년에 개봉한 '남과 여' 후일담
2020-10-06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과거 카레이서로 이름을 떨치던 장 루이(장 루이 트랭티냥)는 현재 치매 증세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기억력 탓에 주위의 걱정을 사지만, 그가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50년 전 우연히 만나 사랑했던 안느(아누크 에메)를 그는 잊지 못한다. 아들 앙트완(앙투안 사이어)이 그런 아버지를 위해 그녀를 찾아 나선다. 마침내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노부인을 찾아내고, 그렇게 과거의 연인들은 재회한다. 하지만 장루이는 눈앞에 앉은 그녀가 과거의 그녀임을 깨닫지 못한다. 비슷한 몸짓과 똑같은 눈빛을 가졌지만, 그의 기억 속 인물과 지금 눈앞의 그녀는 다른 사람이다.

영화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주인공은 1966년에 개봉한 영화 <남과 여>의 주인공들과 동일하다. 장 루이 트랭티냥과 아누크 에메가 같은 역할을 맡고, 과거 영화에서 아들과 딸로 출연했던 앙투안 사이어와 수어드 아미두가 나이 든 자식 역할로 다시 등장한다. 이야기 역시 이전과 동일선상에서 시작된다. 흔히 생각하는 황혼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진부한 관점을 비켜나면서, 영화는 인생을 향한 담대하고 여유 있는 시선을 드러내 보인다. 어둡고 느린 노년의 우울함과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곳에 없다. 대신 사라진 기억의 빛나는 환상을 영화는 과감하게 따르고 있다. 무려 5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캐릭터들이 회상하는 과거의 이야기는 우아하고 감미로우며 때로 쾌활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사랑’은 너무 보편적이라 별로 기대되지 않는 대표적인 소재 중 하나다. 그렇지만 과거 <남과 여>가 그랬듯, 이번 영화는 꽤나 과감하게 감정의 서스펜스를 창출해낸다. 짐작할 수 있는 감정적인 동기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 과정에서 독창적인 우여곡절이 생겨난다. ‘기억을 잃은 남자’라는 캐릭터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좋은 장치가 된다. 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이 실제로도 동일하게 과거를 망각하기 때문에, 인물의 에너지가 실제와 일부 겹쳐진다. 작고 디테일한 부분에서 배우의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첫 장면만 유심히 보아도 이 말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나이 들어 쇠약해진 장 루이의 얼굴을 카메라가 길고 세밀하게 잡아낼 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통해 관객은 충분히 인간적인 상실감을 경험한다. 아누크 에메 또한 훌륭하게 본인 스스로를 연기한다. 이들의 존재를 거쳐 과거의 흑백 이미지는 자동적으로 현재의 선명한 화면과 겹친다.

사실 클로드 를르슈 특유의 ‘자기 인용’이나 ‘과거 작품 활용’ 방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 유기적으로 잘 활용된 예는 없다. 영화 <남과 여>의 유명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배우들이 전달하는 감정의 깊이가 유독 생생하다. 스턴트맨 남편이 사망한 이후 절망에 빠진 젊은 시절의 안느, 아내가 절망적 심정으로 자살한 후 혼자가 된 과거의 남자가 현재의 내러티브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예전 영화의 이야기가 사랑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가 설명되는 것 같다. 각자 상처의 깊이 때문에, 그들은 단번에 사랑할 수 있었다.

고작 27살에 만든 6번째 장편 <남과 여>의 대성공 이후, 기대와 달리 클로드 를르슈는 대중 중심의 프로덕션에 한동안 몰두했다. 당시 비평가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정작 감독은 자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이야기는 솔직하고, 나의 논증 또한 단순하지만, 그건 전부 나 자신의 이야기이다”라고. 우리가 지금 그의 영화에서 느끼는 감정은 어쩌면 그의 삶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과거의 관능적 에너지가 어느덧 감독의 시간을 거쳐 삶에 대한 신뢰와 열망으로 바뀌어 있다. 진정한 사랑의 영감이 공허를 통해 완성된다는 점을 이 영화는 말해준다. 1966년에 보았던 미완의 기차역 장면은 그렇게 철학적인 결말을 맞는다. 예전의 <남과 여>를 보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영화가 전하는 삶의 통찰은 전달될 것이다.

CHECK POINT

총 세편의 영화

1986년 감독은 <남과 여 20년 후>라는 후속편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의 결과물은 관객에게 외면받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영화야말로 진정한 <남과 여>의 후일담이라 할 수 있다.

새벽의 질주

단편영화 <세테앙 랑데부>의 이미지가 영화 후반부에 삽입되어 있다. 새벽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닥 신으로, 이 장면은 연인을 향해 달리던 감독의 경험을 기반으로 완성됐다.

프랑시스 레이

작곡가 프랑시스 레이는 <남과 여> 시리즈 전체의 음악을 총괄했고, 이번 영화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잊을 수 없는 명곡‘<남과 여>의 테마’는 가수 칼로제로의 편곡을 통해 다시 영화에 나온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