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소리도 없이> '서식지'를 만든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2020-10-13
글 : 배동미

“오케이 스돕!” 창복(유재명)의 지시에 따라 태인(유아인)은 천장에 매달린 사람 바로 아래에 비닐을 넓게 깐다. 곧 죽을 사람의 피로 바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이 취하는 사전 조치. 살인을 위한 세팅을 마치자마자 태인과 창복은 현장을 빠져나와 라면 물을 올린다. 구타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지만 듀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한다. 태인과 창복은 조직의 시체를 전담 처리하는 비밀 용역으로, 살인이 일어나기 직전과 직후에 투입돼 시체를 정리하고 암매장까지 책임지는 인물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언제부터 범죄에 가담했는지, 시체 전담을 수주하는 조직은 어떤 이유에서 살인을 저지르는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캐릭터의 기묘하고 독특한 호흡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다. 낮에는 트럭에 계란을 싣고 다니며 수완 좋게 계란 장사를 하던 두 남자는 살인 현장에서 헤어캡, 비옷, 고무장갑으로 무장한 채 시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프로로 변한다. “다른 생각이 들어도 열심히 참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감사해야지.” 창복은 살인을 방조하고 범죄에 깊이 연루된 행동을 그저 일일 뿐이라고 자기 위안하듯 태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신앙심 깊은 시체 청소부다. 듣는 태인은 대꾸가 없는데, 관객으로서는 태인이 말을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다. 표정과 몸짓만으로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전할 뿐 수어로 소통하거나 필담을 나누지도 않는 그는 묘하게 창복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마치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은 얼핏 아버지와 아들, 혹은 동업하면서 사사건건 부딪히는 형제처럼 보이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두 사람이 평소와 달리 ‘산 사람’을 떠맡으면서 시작한다. “내가 늘 거래하는 분이라 믿고 부탁드린다.” 단골 조직원이 거액의 현금을 제시하며 산 사람을 잠시 맡아달라고 주문하고, 창복은 어렵게 주문을 수락한다. 하지만 납치 대상이 11살 초등학교 여아일 줄 몰랐던 두 사람은 적잖이 당황하고, 설상가상으로 납치를 주문했던 조직원은 초주검인 상태로 매달린 채 발견된다. 졸지에 유괴범이 되자 창복은 태인에게 아이를 떠넘기며, 태인의 집으 로 데려가 먹이고 재우라고 설득한다.

<소리도 없이>는 살인과 유괴란 소재를 그리면서도 폭력을 전시하지 않는다. 범죄를 다루지만 약자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하는 법 없이, 기묘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 영화다. 관객은 예기치 않게 유괴범이 된 배우 유아인에게 설득되는 묘한 영화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죽은 어머니의 관 속에 시체를 숨긴 배우 이선균의 연기에 묘하게 설득되는 것과 비슷하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청년의 얼굴을 연기하는 배우 유아인의 힘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목. 그는 시골에 살면서 시장에 나가 계란을 팔고 범죄에 가담해서 나름 큰돈도 챙기는 청년을 연기하기 위해 삭발을 감행하고 체중을 15kg 늘렸다. 메가폰을 잡은 홍의정 감독은 태인이 ‘영역을 침범당한 고릴라’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길 주문했고, 스크린 속 유아인은 정확히 그 표현에 부합하는 느리고 둔해 보이는 연기를 펼친다. 함께 출연한 배우 유재명 역시 호연을 보여주는데, 그가 연기한 창복은 선한 얼굴로 범죄에 가담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성경 속 말씀을 외우며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중년 남성이다.

<소리도 없이>는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단편영화 <서식지>를 만든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젊은 영화인들을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선정하는 ‘베니스 비엔날레 칼리지 시네마’에 2016년 최종 후보로 이름을 올린 작품으로, 각본 역시 홍의정 감독이 직접 집필했다.

CHECK POINT

‘영역을 침범당한 고릴라’처럼

홍의정 감독은 대사 없는 태인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배우 유아인에게 고릴라 영상 링크를 전달했다. 유아인은 홍의정 감독의 설명이 “너무 재밌고 너무 신선했다”고.

신예 홍의정 감독

82년생 홍의정 감독은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 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2012년 런던 필름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2018년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단편영화 <서식지>로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한국단편경쟁 섹션에 초청된 바 있다.

2016년 ‘베니스 비엔날레 칼리지 시네마’ 최종 후보작

베니스 비엔날레 칼리지 시네마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을 선정해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제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2016년 <소리도 없이>와 함께 최종 후보작에 오른 작품으로는 알리 압바시의 <경계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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