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기보다는 다양한 영화 클립으로 채워진 아카이브 영화 관람기 혹은 비평을 위한 사전 작업의 흔적에 가깝다.
클로즈업과 목소리의 영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마크 커즌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여성, 영화사>(2019)이다. 장장 840분에 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재료 삼아 40여개의 주제를 탐구한 로드무비다. ‘영화사’라는 제목과 840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1997)를 연상시킨다. 영화사를 쓰는 동시에 해체하는 고다르의 작품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날 법한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고다르식 영화사와 달리 커즌스는 명확한 규칙성을 지닌 채 개별 영화를 공들여 소개하는 쪽에 가깝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일단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는가’에 관한 질문을 앞뒤로 세운 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와 주요 장르와 주제 등에 관한 질문을 차례로 배치한다.
<영화사(들)>가 영화사를 구성하는 개별자로서 작가 고다르의 존재감을 더욱 또렷이 드러냈다면, 커즌스의 작품 속에서 작가로서 감독은 자취를 감춘다. 타이핑하는 고다르의 모습과 활자가 등장했던 자리는 다양한 장소와 시간으로 점프하는, 하나의 스크린으로서의 자동차 안에서 촬영한 무빙숏과 이따금 등장하는 여성 화자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작가로서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수백개의 클립으로 분산된 여성감독의 작품만이 온전한 스포트라이트의 대상이다.
내레이션에서 밝히듯 <여성, 영화사>는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영화 학교이자, 영화 교재이다. 내레이션은 또한 이 여정의 목적이 감독의 일생이나 연대기적 역사 혹은 남녀의 차이나 최고작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화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처럼 보인다.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싶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매년 영화제 기간을 전후로 여성감독이나 제작자, 평론가 등을 초청해 시네 페미니즘 학교를 연다. 2019년에는 다양한 분야의 영화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노하우를 듣는 시간으로 꾸려졌다. 총 6회로 진행된 자리에 나는 강연 후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자주 들었던 요청은 페미니즘적인 부분을 채워달라는 것이었다. 여성 영화인의 직무 관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곧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나는 영화인들의 직업적 노하우와 페미니즘적인 것을 애써 분리하는 어색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성감독과 남성감독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여성, 영화사>의 전제는 ‘여성’을 카테고리에 넣었을 때 발생하는 ‘여성만의 특별함’에 관한 이중적 속박을 걷어내기 위한 조치다. 물론 ‘여성감독의 영화를 모은 것만으로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생성되는가’라는 질문은 가능하다. 이에 답하자면 ‘그렇다’이다. 여성감독의 영화를 모은 것만으로 의미가 생성되는 이유는 영화사가 남성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틸다 스윈턴이 도입부 내레이션에서 밝혔듯 영화의 역사는 ‘보이 클럽’이다. 우리는 인용될 가치가 충분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인용되는 영화의 목록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소환된 여성감독의 영화가 모두 페미니즘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화의 일부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뤼실 하지할릴러비치의 영화 <에볼루션: 새로운 탄생>(2015)에서 한 소년이 절벽 아래에서 벌거벗은 채 누운 여성의 무리가 뒤엉켜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전체 영화 중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전형적인 남성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관객은 여성감독의 영화에는 불필요한 노출이나 섹스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필요와 불필요는 해석자의 주관적인 의지가 개입된 판단이다. 더군다나 필요에 걸리지 않는 과잉은 영화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며, 그것은 때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해 언급하자면 예술에 있어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은 없다. 다만잘 만든 작품과 못 만든 작품이 있을 뿐이다. <여성, 영화사>에서 논하는 것도 바로 좋은 오프닝, 좋은 구도, 좋은 대화 등 ‘좋은 무엇’에 관한 것이다.
수많은 영화 리스트를 마주한 관람자의 불안
한 가지 전제할 것은, 이 글은 인용된 모든 영화를 관람하고 쓴 것이 아닐뿐더러 언급한 모든 영화를 관람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아가 등장한 모든 영화를 관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려 한다. 관람하지 못한 영화뿐만 아니라 관람했으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영화까지 포함하면 봐야 할 영화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게다가 <여성, 영화사>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차기에 사전에 대부분의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이상 모든 영화를 관람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명하고 싶은 것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파생시킨 영화 관람에 관한 질문, 특히 분절된 형태의 클립으로 영화를 만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한 경험은 한계만큼이나 가능성을 지닌다.
영화에 인용된 클립을 통해 영화를 경험하는 것은 온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체험한 것과는 물론 다르다. 분절된 상태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클로즈업으로 영화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리된 그 자체로 일종의 확대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에 덧붙은 내레이션은 관객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험이 영화의 본래적 체험보다 열등한 방식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이 글이 체험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로 개인적인 일화를 덧붙이고 싶다. 특정 부분을 취하는 것은 때때로 실제 영화 경험을 초과한다. 나의 최초의 시네마틱한 경험 역시 클립처럼 분절된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영화가 이미 시작된 채 흐르고 있었고, 어떤 이야기인지 모른 채 빨려들었다. 그 영화는 레오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였다. <여성, 영화사>에 언급된 주제 중 ‘분위기’에 관한 챕터에서 내레이터는 피리오 홍카살로의 <콘크리트 나이트>(2013)를 두고 “영화 자체가 분위기”라고 말했는데, 이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에도 적절한 수식처럼 보인다. 후에 이 영화를 온전히 관람했을 때는 처음과 같은 사로 잡힘을 경험하진 못했다. 물론 그사이 다양한 영화 경험을 쌓은 탓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분절된 영화 경험을 모조리 배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로는 충분할 것이다.
또 다른 경험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2000)를 보았을 때다. 이때 화면 속에는 교수대를 향해 가는 배우의 가벼운 발걸음이 등장했다. 발걸음을 세는 숫자는 노래로 변했고, 실제와 환상의 뒤섞임은 나를 사로잡았다. 죽음을 향한 발걸음은 결국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극장 경험의 강렬함은 영화 바깥에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가 과도한 핸드헬드 화면에 어지럼증을 느끼고는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독하게도 끝까지 남아 영화를 관람했으나, 최초의 마주침을 뛰어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후 <어둠 속의 댄서> 장면 일부를 국립현대미술관 <하룬 파로키-무엇으로 사는가?> 전시에서 다시 만났다. 하룬 파로키의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2006)이 12채널 설치로 전시되었으며, 이중 하나로 <어둠 속의 댄서>가 포함되었다. 해당 영상은 비욕과 카트린 드뇌브가 공장을 나서며 대화하다가 불쑥 끼어든 한 남자에 의해 방해를 받는 장면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 장면과 생경하게 재회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절된 경험을 통해서도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분절된 영화들은 훗날의 재회를 기다리는 작은 씨앗이다.
여러 편의 영상 속에서도 유독 관객을 사로잡는 영상이 존재한다. 되도록 강렬한 것이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한 나의 체험을 구성하는 것도 가위, 교수형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다. <여성, 영화사>에서도 클립만으로 울림을 준 작품들이 있다. 그중 몇편만 언급하자면, 포르흐 파로 허저트의 단편 <검은 집>(1963)에서 칠판 앞에서 집에 관해 써보라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침묵 속에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문을 떠올린 뒤 마침내 ‘집은 검은색이다’라고 쓰는 장면의 고요함이다. 혹은 킴 론지노트의 다큐멘터리 <잊지 못할 그날>(2002)에서 어린 딸이 할례를 받게 만든 어머니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던 중 옆에 있던 어린 동생을 언급하며 그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으면 어머니를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은 잊기 힘들다. 영화는 ‘노동’ 챕터에서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1975)을 소개하면서 이례적으로 작가의 말을 언급한다. 샹탈 애커만은 이미지의 위계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소외된 여성의 가사 노동을 보여주며 그것을 실천했다. 물론 <잔느 딜망>에도 폭발의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강렬한 사건은 그조차 지루한 시간의 연속을 삼키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여성, 영화사>는 기나긴 러닝타임과 주제 분류를 통해 영화와 장면간의 위계를 없애려 한 샹탈 애커만의 시도를 잇고자 한다.
질문 바깥의 질문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우리는 늘 어떤 목소리와 동행한다. 목소리는 흘러가는 영화를 예측하거나 설명하면서 관람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개별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탐험하는 데 익숙하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영화 유튜버들의 등장으로 다시 활기를 띤다. 좀더 창의적인 방식으로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있다. 영상을 분절하고 연결해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며 개별 영상 작품으로의 가치를 지닌다.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에서 이미지의 연속만으로 발언을 대신한 예도 있으나, 대부분은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통해 화자의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목소리의 진정한 효용은 영화를 정확히 설명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설명에 실패하면서 관람자의 저항을 일으키는 데 있다. 화면 밖 목소리나 영상 위에 덧붙은 자막은 언어를 통해 장면을 한정한다. 그러나 장면의 의미는 결코 해설에 걸리지 않는다. <여성, 영화사>는 40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지만 같은 영화의 다른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하며, 특정 장면 역시 여러 주제를 동시에 환기한다. 영화를 인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특정 장면을 선택해야 하지만 영화에 담긴 풍부한 정보와 이야기는 포착되기보다는 흘러간다. <여성, 영화사>의 중요한 가치는 정확한 설명의 실패에 있으며 아울러 필연적인 실패로서 비평 행위와 만난다. 이것은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전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사>의 내레이션은 대부분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엔딩’ 챕터에서 소개된 수미트라 페리에스의 <걸즈>(1978)는 거울에 대고 자신의 인생에 관해 질문하는 소녀의 독백과 함께 흰색의 물음표 하나를 비추는 독특한 엔딩을 보여준다. <여성, 영화사> 역시 그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를 던지려는 것 같다. 관객에게 주어진 몫은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포괄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특히 ‘신뢰성’ 챕터는 질문이 생성되는 장이다. 디나라 아사노바의 <당신이 선택한 것>(1981)에서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이끌린 채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여자아이는 겁을 먹은 채로 자세를 낮추어 천천히 올라왔다가 다른 아이의 부축을 받은 채 같은 자세로 내려간다. 카메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내레이터는 신뢰성을 위해 배우를 실제로 높은 곳에 올라가게 한 뒤 솔직한 반응을 보여줬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의문을 불러온다. 장면의 진실함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괜찮은가. 영화를 사이에 두고 제작자와 관객 사이에 구축해야 할 신뢰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성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실제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장면은 과장된 위험이 아닌 일상에 산포한 단순한 위험일 뿐이지만, 적어도 이에 관한 코멘트는 의심스럽다.
확장하자면 배우가 대역을 쓰지 않고 고난도의 장면을 촬영했다는 것은 여전히 홍보 포인트가 된다. 그러나 관객은 과연 배우가 위험을 무릅쓰기를 원하는가. 코미디 챕터에 등장한 페니 마셜의 <위기의 암호명>(1986)에서 우피 골드버그가 공중전화 부스에 든 채로 납치된 상황이 펼쳐진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다면 웃어넘길 수 있을 장면이다. 그러나 잘린 장면 속에서 자동차 끝에 매달린 채 위험천만한 레이스를 펼치던 우피 골드버그가 마침내 차에서 분리돼 공중전화 부스와 함께 나뒹구는 장면은 신뢰성 챕터에서 생성된 질문과 만나 그 장면의 위험천만함을 생각하게 된다. 발레리 마사디안의 <나나>(2011)에서는 엄마가 사라진 뒤 홀로 남은 어린 나나가 근처 숲에서 발견한 죽은 토끼를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영화를 위해 동물이 희생되지 않았음을 믿고 싶어 한다. 영화 속에서 재현된 죽음이 실제 배우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신뢰성에 관한 질문은 발리 엑스포트의 실험 SF <인비저블 애드버서리>(1977)에서 한층 복잡해진다. 이 영화는 학소스라는 외계인에 의해 정신분열증을 겪는 한 여성의 일상을 보여준다. 식탁 위에 식재료를 하나하나 내려놓던 여자의 놀란 얼굴이 클로즈업된 직후 식탁 위의 식재료가 동물과 곤충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식재료를 칼로 자르는 클로즈업 몽타주에는 실제로 잘리거나 잘릴 위험에 처한 생선, 햄스터, 앵무새, 딱정벌레가 포함된다. 몽타주는 마침내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아기의 이미지로 정점을 찍는다. 식자재와 인간을 연결하는 몽타주는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일까, 아니면 동식물의 가치를 격상하는 것일까. 이 모든 이미지를 ‘폭력 이미지’로 명명한 채 배격해야 할까, 아니면 전체 영화를 마주한 뒤에 판단할 문제일까. 이러한 시선은 검열이라 할 수 있을까.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하고도 위험한 리얼리티의 시퀀스들은 과연 위험한 리얼리티를 재현의 영역 바깥으로 배격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여성, 영화사>의 마지막 주제로 ‘죽음’과 ‘엔딩’이 놓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엔딩’ 뒤에 ‘노래와 춤’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다소 의외다. 그중에서도 <비욘세: 레모네이드>의 뮤직비디오 영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 영상 속에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전사를 연기한 비욘세는 미소 지으며 다가와 손에 든 방망이를 휘두르며 세트장 곳곳을 파괴한다. 이 퍼포먼스는 마침내 카메라를 때려부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영화는 부서진 카메라와 함께 스스로 파괴되고 싶은 것일까. 혹은 남성 위주로 꾸려진 기존 영화사를 파괴하고자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의 유희일까. 흥미로운 다른 포인트는 <여성, 영화사>라는 분절된 영화 경험 속에서 뮤직비디오와 시리즈 드라마, 단편영화와 장편영화가 구분 없이 뒤섞여 있으며 모두 영화처럼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욘세의 방망이를 빌려 영화가 깨부순 것은 영상간의 암묵적 위계인 것일까. 영화들의 여정은 그렇게 제멋대로 영화 안팎을 아우르며 흘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