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젊은이의 양지' 비극적으로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의 참혹한 단면 속에서 그려왔던 신수원 감독의 신작
2020-10-27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대형 카드회사의 하청 콜센터에서 현장 실습 중인 고등학생 준(윤찬영)은 채권 추심 업무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콜’을 받아 회유와 협박을 반복해야 하는 이곳은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통제받는 전쟁터 같은 곳이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고시원과 콜센터를 오가는 준의 유일한 낙은 사진을 찍는것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희망을 가슴 한구석에 품은 채 준은 애써 웃는 얼굴로 출근한다. 옥상에서 준과 우연히 마주친 콜센터의 센터장 세연(김호정)은 그런 준에게 몇 마디 조언을 건넨다. 그러나 삶이 녹록지 않은 것은 세연도 마찬가지다. 본사의 실적 압박과 갖은 횡포로 세연은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심정으로 살고 있다. 인턴을 병행하며 취업 준비 중인 딸 미래(정하담)도 세연의 걱정거리다. 어느 저녁, 딸 미래와 다투던 세연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직접 연체금을 받으러 간 곳에서 울먹이며 전화한 준에게 세연은 모진 말을 쏟아낸다. 다음날 준이 유서를 남긴 채 사라지고, 세연에게는 섬뜩한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한다.

<명왕성>(2012), <마돈나>(2014), <유리정원>(2017) 등 기이하고 비극적으로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의 참혹한 단면 속에서 그려왔던 신수원 감독의 신작이다.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채권 추심 콜센터를 주무대로 세명의 주인공이 때로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때로는 방관자와 목격자의 관계로 복잡하게 뒤엉킨다.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준에게 센터장 세연은 처음엔 따뜻하고 듬직한 어른으로 다가오지만, 갑작스러운 사건이 터지며 두 사람의 관계는 의도치 않게 뒤틀리고 만다. 그리고 세연이 내뱉었던 쓰라린 말들은 세연에게 되돌아오며 깊은 상처를 남긴다. 세연은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준을 발견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스릴러로서의 외형을 유지해나가며 세연을 중심으로 준의 과거와 미래의 현재를 오간다. 준과 미래는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성별도, 나이도, 학력도 다르지만 절박한 상황과 정서를 공유하며 세연의 세계, 나아가 영화의 세계 안에서 하나의 인물처럼 겹친다. 19살 콜센터 실습생 준과 20대 취업 준비생 미래는 세연을 포함한 세상이 던지는 말과 시선에 수치심을 느끼고 좌절하며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세연이 절대적 가해자의 위치인 것은 아니다.

전작에서 그래왔듯 신수원 감독은 우리 사회의 냉혹한 먹이사슬 안에서 원치 않게 가해자가 된 피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 가해자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화 속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세연 또한 마땅히 양지바른 곳을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연으로 대표되는 영화의 목소리는 뒤늦은 사과와 후회의 목소리인 동시에 손길을 건네는 의지와 연대의 목소리로서도 작동한다. 다만 비극적 사건을 겪는 준의 궤적을 서서히 뒤쫓아가는 영화는 앞서 보지 못했던 참상을 처절하게 담아내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묘사가 필요했는지에 대해선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역량이 중요한데, 주인공 세연 역을 맡은 배우 김호정은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지탱하며 서늘하고 처연한 분위기를 더한다. 김호정은 <마돈나>에 이어 신수원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췄다. 19살의 콜센터 실습생 준 역의 배우 윤찬영은 연기도 연기지만 외모와 나이 등 역할에 알맞은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세연과 준 사이 교집합으로 존재하는 미래 역의 배우 정하담 또한 특유의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이며 혼란스러운 청년의 초상을 안정적으로 소화한다. 치열한 취업 경쟁을 소재로 한 임정은 감독의 단편 <새벽>(2018)에서 흔들리는 눈빛과 초조한 감정을 섬세하게 연기했던 정하담은 신수원 감독과의 작업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젊은이의 양지>는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 초청되었다.

CHECK POINT

구의역 사고

지난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19살 청년 김군 사건은 우리 사회는 물론 신수원 감독에게도 큰 충격과 잔상을 남겼다. 이후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콜센터의 19살 직원이 자살한 사건을 알게 된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무거운마음이었지만 “꼭 만들어야 한다”라는 의지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루시드 폴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 가수 루시드 폴의 음악은 영화 속에서 콜센터 실습생 준과 조각가 명호(최준영)의 인연을 상징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준과 명호는 루시드 폴의 노래를 계기로 특별한 연을 이어나가며 친구가 된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위로와 여운을 남긴다.

방 탈출 게임

영화에서 채권 추심 콜센터 다음으로 중요한 공간은 방 탈출 카페다. 준이 보내오는 메시지를 통해 숨겨진 비밀과 진실을 뒤좇던 세연은 그 과정에서 방 탈출 카페를 방문하게 된다. 제한 시간 내에 정해진 단서를 바탕으로 밀실을 탈출해야 하는 방 탈출 게임은 영화의 전반적 전개 방식과도 조응하며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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